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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과 인격적 대화에 대한 가르침

새벽지기1 2015. 12. 1. 13:53

 

 

하나님과 인격적 대화에 대한 가르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성경적 생활에서 필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울 수 없는 종교적인 교회의 시스템 속에서 잘못된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1. 성경은 대화의 기록이다

 

놀랍게도 성경의 모든 기록은 일방적으로 “너는 이렇게 하여야 한다.”는 주입식이 아니라 인격을 전제로 한 대화 내용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상대방은 하나님이시다. 대화의 내용이 성경의 기록이라면 하나님과 대화를 하지 못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신앙생활은 그분이 나와 함께 동행한다는 것을 증명해 나가는 생활이다. 하나님이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나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여 행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이런 생활은 하나님과 대화를 하지 않고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성경의 모든 기록이 대화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관계 속에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겠는가?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서는 구원자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기록이다. 구원받은 자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에 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한다. 만약,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세상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면 성경의 내용은 생활에 하나도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대화가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삶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의 문제를 하나님으로부터 해결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내용과는 다르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해결 받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삶은 내일을 걱정하고 노후를 걱정한다. 여기서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면서 내 힘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맡기고 성경대로 갈 것인지 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걱정하고, 내일 일을 염려하고, 노후를 걱정하고, 그리고 죽어서는 지옥을 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동행을 하면서 삶의 문제나 염려는 하나님으로부터 해결 받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브라함의 유업을 물려받아 누리다가 죽어서는 천국에 가는 성경적인 생활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생활이라면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이 듣지 못하신다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귀를 만드신 분이 듣지 않으시겠는가? 눈을 만들어 주신 분이 보지 않으시겠는가?(시 94:9) 귀가 둔해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팔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사 59:1)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입을 만들어주시고 혀를 만들어주신 분이 어찌 말씀하지 않으시겠는가?

 

성령님은 벙어리가 아니시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 대화하지 못하는 가짜 기독교, 거짓신앙의 구조적인 결함 때문인 것이다. 부모가 벙어리면 자식이 말을 배울 기회가 없듯이 우리를 가르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라면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양을 약탈하고 노략질하는 늑대들인 것이다.

 

 

2. 엘리 사역의 부재

 

“8 주께서 세 번째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니,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말하기를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에 내가 여기 왔나이다.”하니, 엘리가 주께서 그 아이를 부르신 줄 깨닫더라 9 그러므로 엘리가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가서 누우라. 만일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너는 말하기를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나이다.’하라.”하니라. 그리하여 사무엘이 가서 그의 자리에 누우니라“(삼상 3:8-9) [한글킹]

 

본문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아듣지 못하자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가르치는 대목이다. 사무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서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자(삼상 3:7) 엘리 제사장이 “지금 네가 듣는 것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가르쳐준 것이다. 이 엘리 사역이 지금 우리 신앙생활에 전무하다. 하나님의 언어가 무엇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의사표시를 하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어떤 표징들이 나타나는가를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에게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엘리 제사장은 글로써 가르친 것이 아니고, 지식적으로 말한 것도 아니고 학문적으로 말한 것도 아니었다. 영의 실재를 가르친 것이다. “네가 듣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단계로 진입되면 많은 문제들이 따른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분별하는가의 분별의 문제, 영의 실재와 함께하는 성령님의 조명, 즉 계시에 대한 질문, 성경의 원리들과 법칙 등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에 도달하기 전에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치는 사역, 즉 엘리 사역이 우리 신앙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 사역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주님과 동행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은 없고 학문적인 교리만을 가르치는 지금의 기독교는 영의 실재는 없고 이론만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개념이 없는 거짓신앙의 이론가들의 가르침에 의해 생활 속에서의 하나님의 인도, 즉 성경이 없었을 때 노아를 인도하여 방주를 만들게 하셨던 것과 같은 생활 속에서의 사실적인 인도가 없고, 단순히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따르는 것으로 바뀌어져 있다. 우리의 생활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 실질적인 해결 방법을 가르쳐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인도하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의 논리를 보자. 그들은 각자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라고 말하고, 분명히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나 기도를 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구체적인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다고 말하면 미쳤다고 하고 정신분열이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정상이고 그 응답을 듣는 것은 비정상이라는 것인가? 이들은 성경의 사두개인들처럼 하나님께서 각 개인들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게 막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하나님께선 양들에게는 말씀하지 않고 목사에게만 말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정작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의 음성을 들었을 때는 절망감에 빠진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질문하게 되고 거짓신앙의 실체를 보게 된다. 사탄의 하수인들의 종교놀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벙어리가 아니시다. 입을 만들어 주신 분이고 귀를 만들어 주신 분이다. 그분과의 개별적인 대화 없이 인격적인 동행은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성경적인 생활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땅에서 살아야 하고 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생활을 영위하여야 한다.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믿음은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생활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안다면 이론적인 교리를 적용시키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3. 성경 속 인물들의 체험

 

성경적인 생활을 위해서 반드시 복원되어야 할 것 가운데 다른 하나는 성경 속의 인물들이 체험한 하나님을 우리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경 인물들의 체험을 우리 생활에 구현시키는 방법들을 구약성경을 통해서 찾지 못하면 성경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는 일반적인 섭리 그 이상이다. “너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 “세상 끝까지 너와 함께하리라.”(마 28:20)는 구절들은 주님과 인격적인 동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절들이다. 인격적 관계는 일대일의 관계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말씀처럼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그때그때 채우신다. 성경의 기록들은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의 일대일의 동행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기록한 역사의 기록들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해서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 환상이 무엇이고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마음속에서 올라온 하나님의 음성에 대하여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온은 양털 실험을 한 것이다.(판 6:17)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하여 혼란에 빠져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 것인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생활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이 어떤 결국에 이르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는 신앙생활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확한 성경적 근거를 토대로 성경적 생활의 실체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종교적인 일상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기록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동행의 관계를 우리 생활 속에 구현시키지 못한다면 종교적 생활은 계속될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동행이나 하나님의 도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 냉혹한 것은 나 자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생활을 해야 하는 현실이다. 하나님의 도움은 받지 못하고 있지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내 힘으로 찾고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내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계속되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교회는 다니고 있는 것이다. 성경적인 생활이 아니라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짐은 세상 짐대로 지고 가면서, 교회의 짐은 교회의 짐대로 지고 가고 있는 것이다. 무거운 세상 짐에다 교회 짐을 하나 더 올려서 낑낑대고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오류 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오류에서 벗어나려면 성경 속의 인물들의 삶을 내 생활 속에서 구현해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 성경대로 가야만 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을(요 10:27) 분명히 인식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정신분열 증세가 아니고 미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특별히 권면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이다. 훈련된 사람은 경험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알 수 있다.(요일 2:27) 그러나 주의할 것은 성경구절과 토씨하나 틀리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음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탄은 성경에 대해서 해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리새인들을 보라. 그들이 성경에 얼마나 해박하였는가를 보라.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성경에 대해서 해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계략을 알지 못하여서 거짓신앙을 참 신앙으로 알았다. 따라서 성경도 온전히 성령님의 조명으로 성경 전체를 알아야 한다. 국지적이고 단적인 것을 전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 성령님의 조명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생활과 성경은 무관하다.(각주참조)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반드시 가르치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은사자들 사이에서는 종종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큰 잘못이다. 틀림없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모세야 모세야, 사울아 사울아”라고 지명하여 부르셨듯이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인지 몰랐다. 엘리 제사장이 가르쳐 주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은 배워야 안다. 분명한 것은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몇 십 년 동안 떨어져 있던 사람의 목소리를 한 번에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 가운데 오시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음성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배우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

 

보편적으로 듣게 되는 하나님의 음성은 성령님이 내적인 감동으로 말씀하시는 내적 음성이다. 이 내적 음성은 성경의 말씀에 반反하지 않는다. 그리고 평안과 확신이 들어온다. 그 후에, 기다리면 환경이 열린다. 환경이 되어져 간다. 이 네 가지는 따로 놀지 않는다. 서로 교정 역할을 하면서 사탄의 음성과 내 생각을 걸러낸다.(각주참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움직일 때 환경이 열린다. 홍해가 갈라지는 순간이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사탄이 항복하고 항서를 쓰는 순간이다. 선포기도를 하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오는 순간 선포기도를 하면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당연히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각주참조)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필수이다. 그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무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경적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시중의 기독교의 아주 잘못된 오류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회복시리즈 03. 성경적 생활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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