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목회자,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목회신학적 관점에서
이 현준 목사 churchr@churchr.or.kr
1. 들어가는 말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감당한다고 하는 것이 좁은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겠지만 이 시대 한국 사회 속에서 목회자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길임을 갈수록 절감하게 된다. 한 때는 목회자가 인기 있는 신랑 후보감으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잘 나가는(?) 시절도 있었지만, 그것은 정작 한 순간 반짝이며 사라지는 반딧불 같은 영화였으며 그 동기 또한 달갑지도 않은 것이었다.
지난 해 아프간 피랍사태 때 한국 교회에 쏟아졌던 사회의 비난과 냉소가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 교회에 대한 비난은 상당 부분 목회자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로 일부 대형교회에 한정한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교회와 목회자의 납세문제, 재정 투명성 문제, 일부 목회자의 호화생활 등을 고발한 시사 프로그램이 방송되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목회자로서의 갈등과 고민은 점점 극에 달하고 있는 느낌이다. 게다가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 대한 사회의 도전이 앞으로도 더욱 조직적으로, 더욱 치밀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저들의 비난과 주장이 모두 다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시시비비를 논하기 전에 그 속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을 향해 꾸짖으시는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한국 교회가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가고 있으니 더 늦기 전에 정신을 차리라는 하나님의 경고하시는 음성인 것이다.
사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렇게 어려운 국면을 맞게 된 데는 우리 목회자들의 책임이 가장 큰 몫을 담당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를 뒤집어서 생각하면, 오늘 우리 목회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국 교회는 다시금 제 자리를 찾아갈 수도 있다는 희망도 갖게 된다. 때문에 한국 교회의 개혁과 갱신의 과제는 우리 목회자들의 회개와 각성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개혁의 대상이자 동시에 주체이기도 하다. 우리 목회자들로부터 시작된 개혁운동이 온 신자들과 교회, 사회로 확산되어 가야 한다. 이런 시대적 요청을 염두에 두고서 “이 시대의 목회자,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목회신학적 관점에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이 시대 속의 교회와 목회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21세기는 변화의 시대다. 그것도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시대다. 어제의 성취가 내일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하는 집단이나 개인은 이 시대에 낙오될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때문에 이 시대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변화의 흐름을 정확히 진단하고, 그에 대해 적절히 대응할 능력과 전략을 요구한다.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작년 아프간 사태로부터 작금의 촛불집회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건들은 새로운 시대적 조류에 합류하지 못하고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사고와 행태에 머물러 있는 집단들을 심판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을 준다. 그 집단들이란 다름 아닌 새롭게 출범한 이명박 정부, 조∙중∙동으로 일컬어지는 보수언론, 그리고 한국 교회다. 모두가 과거에는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기득권에 안주하면서 현실에 대한 안일한 인식과 대응이 그들 모두를 위기적 국면으로 몰아가고 있다.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는 수구적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 있어 이미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다. 기업들은 브랜드 이미지 창출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광고와 홍보비에 지출하고 있고, 비슷한 수준의 상품이라 할지라도 브랜드 이미지 가치에 따라 가격차는 현저해진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쌍방향 교류가 가능해짐에 따라 ‘시민 권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반 대중들의 참여와 영향력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현실에 비추어볼 때 대중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그것이 정확한 것이건 왜곡된 것이건 간에-의 중요성은 갈수록 증대되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의 이미지 개선이 참으로 시급한 과제다. 이미지는 대부분 오랜 시간과 과정을 통해 형성되지만, 한 번 형성되면 그것을 바꾸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특성을 갖는다. 우리가 염려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 ‘개독교’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반기독교적 정서가 팽배해 있다.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초탈해야 할 교회가 자본주의의 구조에 편승해 종교기업을 지향하고, 다원화 문화 속에서도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아집 속에 사로잡혀 있으며, 윤리나 도덕적인 면에서도 전혀 본받을 것이 없는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고착되어 가고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한국 기독교를 향한 비판자들의 독설 속에서 참된 영성을 희구하는 저들의 절규소리를 듣게 된다. 인간이 소외되고 비인간화 된 현실 속에서 종교라도 본 모습을 찾으면서 소망의 탈출구가 되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을 듣는다. 제발 교회라도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이 시대를 구원해 달라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직자가 성직자다워지는 모습 속에서 사회적인 치유의 역사도 일어나게 될 것이다. 본질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과제일 텐데 먼저 목회자의 본질로서 우리는 누구인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3. 목회자는 누구인가?
1)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이다.
흔히들 목회자를 지칭할 때 ‘주의 종’이라는 표현을 쓴다. 아주 정확하고 중요한 말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때문에 목회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으로서의 자기고백이며, 주인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는 피동성과 헌신성이다. 목회자가 사람들의 눈치나 보고 비위나 맞추는 사람들의 종이 된다든지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세상의 종이 된다면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 강단에서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적인 말씀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언제나 위로와 평안을 주는 말씀만이 넘쳐난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려는 사역보다 목회자 자신의 성공과 목적을 이루려고 애쓰는 모습도 느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중세적 기독교 왕국의 형태로 대체되기도 하고, 사역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목회자나 신도들의 열심에 달려 있는 것처럼 호도되기도 한다. 이는 모두가 목회자의 신분과 위치를 망각한 데서 기인한 현상들이다.
19세기 말에 미국 앤도버 뉴턴Andover Newton이라는 신학교에서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이 충만한 나머지 “우리 세대에 세계를 그리스도에게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많은 학생들이 선교현장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세계선교가 활성화되는 촉진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기대했던 세계 복음화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때때로 우리 목회자들은 스스로의 열정에 사로 잡혀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복음전도와 부흥이라는 명분으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우쭐대기도 하고,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성공이라면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목회자의 정체성을 외형적인 성과에 두려는 성공주의적 마인드를 경계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교회성장이 정체되고 탈종교적인 성향의 시대 속에서는 성공주의 신화가 자칫 목회자의 정체성의 위기로까지 내몰 수도 있다. 낙심하는 엘리야에게 야훼께서는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남은 자가 칠천이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칠천 명의 남은 자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듯 조용한 가운데 내면적으로 진행되어져 간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절로 과실을 맺듯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쓰임받기에 합당한 준비만 갖추고 있으면 사역의 열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때가 되면 나타나게 될 것이다.
2) 목회자는 말씀의 선포자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은 목회자의 가장 큰 영광이요 특권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인가 라는 것이 의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혹시 우리의 생각이나 신념을 선포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신령한 지혜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의 귀가 열려 있어야 하는데, 우리 목회자들은 얼마나 하나님과 내통(內通)하고 있을까. 우리가 목회자이고, 한 주일에도 몇 번씩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있다고 당연시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도 없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분별한다고 했는데, 신앙과 삶이 괴리되고, 세상 속에서도 소금과 빛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보면 오늘 우리가 전하고 있는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인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음식이라고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 음식 중에는 영양분이 많아서 생명과 건강을 주는 좋은 음식이 있는가 하면, 인스턴트식품과 같이 단지 칼로리만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인체에 해를 끼치는 음식도 있다. 마찬가지로 말씀이라고 해서 다 같은 말씀은 아닌 것 같다. 세상적인 성공과 축복을 강조하므로 세상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고착화시키는 ‘세상복음’이 있는가 하면, 승리의 면류관을 얻기까지 좁은 길, 진리의 길,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기쁨으로 달려가게 하는 ‘천국복음’이 있다. 세상복음을 가지고는 신도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킬 수 없다. 자기중심적인 가라지 신자들만 양산할 뿐이다. 한국 교회 강단에서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의 갱신은 강단의 갱신에서 출발해야 한다. 살아 있는 말씀만이 신자들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까지 영적 성장을 이루어가게 할 것이다.
3) 목회자는 목자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부르셔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다. 곧 목양의 사명을 주신 것이다. 목회자pastor라는 말의 어원도 양치기에서 유래하였다. 목회자가 목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길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어디에 푸른 초장, 맑은 시냇가가 있는지, 또 어느 길로 가야 안전한지를 목자는 꿰뚫고 있어야 한다. 주님의 양무리를 이끌 책임을 부여받은 우리 목회자들도 신앙의 로드맵에 정통해야만 한다. 그래야 저들을 하나님의 품에까지 안전하게 인도할 수가 있다. 결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행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십자가의 은혜로 중생의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하늘의 영광과 기업을 바라보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 교회에 과연 이런 푯대와 이정표가 얼마나 잘 제시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영적인 목표가 설정되지도 않고, 또 이끌어주는 사람도 적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적인 방황을 하면서 눈에 보이는 세계에 취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칼 바르트는 그의 『교회 교의학』에서 교회의 존재양식을 다음 세 가지로 정의하였다: 1) 모이는 교회gathering church; 2) 몸을 세우는 교회upbuilding church; 3) 파송하는 교회sending church. 교회의 존재양식이 그렇다면 목양의 목표와 방향도 자명해진다. 모이는 교회를 위한 복음전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양육과 봉사, 그리고 복음의 증인들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가는 그리스도의 제자 양성이 바로 목양의 지향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4) 목회자는 구도자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현실을 대변하는 사자(使者)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역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연약한 한 영혼이며, 선포한 말씀을 삶을 통해 실천의 본을 보여야 할 책무가 있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엄하게 질책하셨고,1)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23:25-26). 사도 바울 또한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24)고 하였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사도 바울 같은 대 사도도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하였다면 하물며 우리일까.
예수께서는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는 한 서기관의 결단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말씀하셨다. 또 무리와 제자들을 부르시고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고 하셨다. 목회자의 길은 세상적인 영광의 길이 아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만이 갈 수 있는 길이다(막10:28). 이것이 목회자의 본질이요 우리가 돌아가야 할 초심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주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구도자의 길은 단순, 청빈, 묵상, 섬김의 삶이다. 필요 이상의 소유와 사치생활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다든지, 명예나 종교권력의 자리를 탐하는 추한 모습을 보여서는 정말 곤란하다. 가난과 무명과 무욕을 오히려 기뻐하면서 오직 주님 안에서 하늘의 기쁨과 평안이 가득하도록 끊임없는 영성훈련의 삶에 정진해야 할 것이다.
4.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이 시대의 교회공동체를 책임 맡고 있는 목회자로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사실 목회자의 정체성 부분에서 그 윤곽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나면 목회자로서 해야 할 일 또한 자연스럽게 분명해진다. 한 마디로 목회자의 본질로 돌아가서 목회자답게 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하겠다. 그렇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실천지침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몇 가지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1) 목회신학을 정립해야 한다.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바른 가치관과 인생관을 지녀야 하듯이 건강한 목회를 위해서도 바른 목회신학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물질주의, 성공주의, 실용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 현실적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복음적 목회를 견지해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학적인 바탕이 튼튼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에큐메니칼 기구의 문서들, 예컨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의 선언문과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의 “아크라 선언”The Accra Confession 등은 성서와 전통과 오늘의 상황을 통전적으로 이해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하였다(잠29:18).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 내세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 신자와 공동체는 세속의 유혹에 현혹되어 방자히 행할 수밖에 없다. 거대한 세속화의 탁류 속에서 교회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보다 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소망을 분명히 해야 한다.
목회자들의 목회자로 잘 알려진 영성가 유진 피터슨은 『목회 영성의 흐름, 주일과 주일 사이』라는 책에서 목회자의 본질 중의 하나가 파괴성에 있다고 하였다. 목회자는 자아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파괴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예수는 파괴주의의 대가이며, 하나님 나라는 혁명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였다.2) Eugene H. Peterson, 차성구 역, 목회영성의 흐름, 주일과 주일 사이 (좋은 씨앗, 2002), pp.46~48. 이 시대의 목회자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으로 여겨진다.
이 시대는 물질주의, 향락주의, 인본주의, 상대주의가 극에 달해 있다. 한 마디로 극단적인 물성의 시대다. 때문에 영적인 돌파구를 모색하는 영성 희구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새로운 영적 대안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혁명성은 물리적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식의 개조에 의해 담보된다. 인생의 목적은 성공과 출세가 아니라 섬김과 나눔에 있다는 가치관의 혁명, 자기중심적 삶에서 이웃과 하나님을 향한 삶으로의 인생관의 혁명, 그리고 보이는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영원한 세계를 지향하는 세계관의 혁명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이라 할 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바로 이런 혁명적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 목회자들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골리앗 세상에 복음의 기치를 들고 도전하는 다윗의 전사들로 키워나가야 한다. 그것이 곧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는 길일 것이다.
3) 신자들의 영적 성숙에 진력해야 한다.
자연적 생명이나 영적 생명이나 모든 생명의 특징은 자라남에 있다. 한국 교회는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거듭난 자들은 많지만,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하고 영적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신자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 목회자들이 양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까닭이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 불신자 전도에는 혼신의 힘을 다하지만, 상대적으로 신자들의 영적 성숙과 성화의 구원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주소인 것 같다. 그러나 생명을 낳는 일과 양육하는 일은 똑같이 중요한 문제다. 아이를 낳아만 놓고 돌보지도 않는 부모가 있다면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다.
한국 교회는 120여 년의 짧은 선교 역사 속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축복의 역사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나 속이 텅 빈 가라지처럼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김도 매주고, 햇빛과 물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씨가 자라나서 열매가 되어 완전히 곳간에 들어가기까지 농부는 한시도 마음을 놓지 않는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라도 여전히 이기심, 허영심, 물욕, 정욕, 시기, 질투, 인본주의적 사고를 떨쳐버리지 못하면 육에 속한 신자이다. 한국 교회가 바로 이런 육에서 속한 신자와 목회자들로 넘쳐나기 때문에 부패하고 세속화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 만연한 세속화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은 성화의 복음밖에 없다. 우리 목회자들이 불신자들의 영혼에 대한 관심만큼 만이라도 기존 신자들의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영적 성숙을 위해 힘쓸 때 한국 교회가 다시금 건강성을 회복하게 되리라 믿는다.
4) 사회와 교회 안의 양극화 해소에 앞장서야 한다.
이번 서해안 기름 유출 사태를 통해서도 잘 나타났듯이 사회의 위기적 상황은 언제나 한국 교회가 착한 행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갈수록 심해져 가는 사회 경제적 양극화, 과중한 사교육비 지출과 그로 말미암은 가난의 대물림 현상, 고령화로 인한 노인문제, 장애우 문제, FTA로 인한 농어촌의 위기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제반 현안들은 한편으로 다시 한 번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를 섬기고 변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피곤과 허기에 지친 무리들을 불쌍히 보시는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주님은 동일한 명령을 한국 교회에 하시는 줄로 믿는다. 한국 교회가 소금과 빛의 공동체로서 사회를 섬길 수 있는 길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할 수 있도록 우리가 목회적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소극적이고 산발적인 구제활동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실천 방안들을 모색했으면 싶다.
아울러 이제는 한국 교회 안에 존재하는 양극화 해소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중소기업이 건실해야 나라의 경제가 안정되듯이 한국 교회도 작은 교회들이 성장해야 전체적으로 다시금 부흥기를 맞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목회는 목회자의 비즈니스가 아니다. 하나님의 비즈니스다. 그러므로 내 목회 현장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지체의식을 가지고 형제교회의 어려움을 함께 나눠갈 수 있어야 한다. 개 교회주의야말로 한국 교회를 병들게 하고 쇠잔하게 하는 가장 고질적 병폐 중의 하나다. 교회는 다니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이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익명의 신앙생활의 틀을 벗어나 섬기는 현장을 찾아 나설 때 한국 교회는 다시금 재도약의 부흥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의식전환에 앞장서 나가야 할 것이다.
5. 맺는 말
감명 깊게 읽었던 유진 피터슨의 책 가운데 방선기 목사가 쓴 ‘권하는 글’이 무척 마음에 다가왔던 적이 있다. 그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발제를 마치고자 한다.
'좋은 말씀 >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행함=구원’을 주장하신 임태수 박사님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서문강목사 (1) | 2015.11.29 |
---|---|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라(히11:24-26)-2012.2.26(예종교회) (0) | 2015.11.23 |
환경보전과 기독교 (0) | 2015.11.12 |
신칼빈주의 운동이 사회에 미친 영향/이정석 교수 (0) | 2015.11.11 |
신칼빈주의운동(유해무) (0) | 2015.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