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타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라(히11:24-26)-2012.2.26(예종교회)

새벽지기1 2015. 11. 23. 11:19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인 부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로 의식주문제입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갖게 되는 근본적인 부담감입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갖게 되는 또 다른 부담감이 있습니다. 이른바 사회적 부담감입니다. 이 부담감은 사람답게 살기위한 부담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또 한가지의 부담감을 갖고 삽니다.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한 거룩한 부담감입니다.

 

 죄악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 가운데 부담없는 인간이 어디 있을 것이며, 부담없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서로간에 부담을 주기도하고 받기도 하며 살아갑니다. 부담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부담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부담감이 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일에 지금 당신에게 어떤 부담감도 없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며, 만일에 그것이 진짜라면 당신은 죽은 사람입니다. 참새는 참새의 날개가 있고, 독수리는 독수리의 날개가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부담감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인간이든지 부담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해도 부담감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담감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부담감을 못 느끼는 것이 더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부담감은 우리 인생을 성장시키고 성숙하게 하는 반갑지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에너지원입니다.

 

 부담감은 우리의 마음을 무척 무겁게 하고 짐스럽게 하며, 힘들게 합니다. 때로는 무척 불편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반갑지않은 부담감을 통해서 우리 인생이 보다 더 풍성하게 되고 성장케 되는 것입니다. 부담감은 쉬운말로 자신이 감당하기위해 느끼는 책임의식을 말합니다. 때문에 모든 인생은 부담감이 있다는 말입니다. 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가장도 부담감이 있고, 식구들의 식생활을 책임지고 감당하려는 아내에게도 부담감은 당연히 있습니다. 거기에 딸린 자식들도 거기에 맞는 부담감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의 부담감은 얼마나 막중할 것이며, 위정자들의 부담감은 왜 없겠습니까? 장사하는 사람이나 사업하는 사람에게도 부담감은 있습니다. 직장생활하며 월급을 받는 샐러리맨들도 여전히 부담감을 갖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의 부담감도 있고,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에게도 부담감이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교회안에 목사에게도 부담감이 있고, 성도들에게도 부담감이 적잖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 어떤 일에 부담감이 없는 일이 있을 것이며, 세상 어디에 부담감이 없는 공간이 있겠습니까?

 

 굳이 부담감이 스트레스로까지 연결될 필요는 없지만 부담감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장 복된 자입니다. 특별히 예수믿는 성도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가 갖는 부담감을 영적부담감이라고 말합니다. 다른말로 거룩한 부담감입니다. 거룩한 부담감은 믿는 성도를 가장 풍성하게 살찌우는 최고의 영양소입니다. 가장 좋은 영적자산입니다. 오늘날 비참하게도 많은 성도들이 거룩한 부담감을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믿음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부담감을 갖지 않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절대 은혜받지 못한 성도입니다. 나름대로는 잘 믿는척해도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기만입니다. 아무리 자기 가정을 사랑하고 자기 식구들을 사랑한다고 큰소리를 쳐도 가정과 식구들에 대한 부담감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속임수에 불과할 뿐입니다. 죄송하지만 우리 믿음은 거룩한 부담감을 통해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당신이 영적인 사람이라면 거룩한 부담감을 갖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유입니다.

 

 요즘은 부담감없는 교회를 찾아서 쇼핑을 다니는 교인들이 자꾸만 늘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못된 것은 절대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배우지도 맙시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는 영적인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부담감은 영적인 책임감입니다. 성도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당연하지만 반드시 내가 감당해야 할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한결같이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혹시 한 사람이라도 영적부담감이 없이 살았던 인물이 있었다면 제게 알려주십시오.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부담감이 있었을 것이고, 이삭은 순종에 대한 부담감, 야곱은 열정에 대한 부담감, 요셉은 진실에 대한 부담감, 다윗은 충성에 대한 부담감, 바울은 복음에 대한 부담감이 누구보다도 강하게 있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시대마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거룩한 부담감을 지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고 있던 영적부담감 때문에 하나님과 친밀해졌고, 그들에게 더 큰 사명이 주어졌으며, 그들은 그것을 오히려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한 부담감이 그들에게 짐이 아니라 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11장 28절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부담스럽게 느끼는 짐을 가지고 주님께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대신 우리 짐을 맡아주시고 우리에게는 참된 안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담감을 가지고 낑낑대면서 고민하지 말고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는 부담감이라도 우리가 감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부담감을 가질지라도 우리 주님이 우리의 부담을 덜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는 부담감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우리 주변에 지나친 부담감으로 인해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예 삶을 포기해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지나친 부담감으로 인하여 생명까지 끊어버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지나친 부담감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부담감이라도 자기혼자 감당하려고 몸부림을 쳐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지나친 부담감으로 인하여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주저앉아버리거나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것을 자기 혼자 감당할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부담감을 가지는 것은 위험합니다. 무엇보다 더 위험한 것은 어떤 부담감이라도 기도없이 자기 혼자서 감당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만이고, 만용입니다. 크던지 작던지 어떤 부담감이든지간에 기도없이 하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모든 부담감은 절대 기도가 우선입니다.

 

 우리가 읽었던 본문을 통해서 모세의 거룩한 부담감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거룩한 부담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거룩한 부담감을 한번도 내려놓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항상 그는 하나님앞에서 긴장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앞에 민감한 자로 살았습니다. 거룩한 부담감을 가진 사람은 영적으로 긴장하며 삽니다. 세상앞에 둔감할지라도 하나님앞에서는 민감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부담감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전혀 긴장을 모르며 삽니다. 영적으로 민감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세월이 흘러가는대로 삽니다. 죄송하지만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두말할 필요없이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이 살고 육이 삽니다. 오늘 모세의 부담감을 살펴보십시다.

 

(1) 신분에 대한 부담감을 가졌습니다(24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우리는 보통 모세의 일생을 3기로 나눕니다. 1기는 바로왕의 궁궐에서 40년을 살았고, 2기는 미디안광야에서 40년을 훈련받은 시기며, 3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자기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시기입니다. 모세는 시대적으로 불우한 시대에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독특한 은혜로 죽임을 면제받고 바로왕의 궁중으로 들어가서 왕자의 신분을 가진 채로 살았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가장 화려한 궁중에서 애굽의 최고의 혜택을 누리며 부러울 것 없이 살았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애굽의 1인자가 될 수도 있는 최고의 자리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하루를 살다갈지라도 사람답게 살아온 시간들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라면서 자기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위치에 있을지라도 자기 정체성에 대한 회의심을 갖게 되면 삶에 대한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뿌리를 찾으려고 하고, 분명한 자기를 발견하려고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가끔씩 입양했던 한인세대들이 그곳에서 출세를 하고 기반을 잡았는데 정체성문제로 혼란을 겪다가 뿌리를 찾겠다고 조국을 찾아오는 일들을 심심찮게 보지 않습니까? 사람이 자기가 누군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라면서 모세는 자기정체성에 대한 회의심을 갖게 됩니다. 이른바 자기신분에 대한 정체성이지요. 정말 자기가 애굽공주의 아들인가에 대한 회의심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세웠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히브리인에 대한 묘한 이끌림을 허락하십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속일수 없는 히브리인에 대한 이끌림으로 인하여 어느 날 모세는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를 치고 맙니다.

 

 출애굽기 2장11절 이하에 보면 어떤 애굽사람이 어떤 히브리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서 모세의 이상한 이끌림이 그를 충동시켰던 것입니다. 결국 애굽인을 죽이고 모래속에 파묻어 버렸습니다. 이 사건이 탄로가 되어 모세는 바로의 궁중을 나오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그것으로 모세는 바로의 궁중을 박차고 나오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일이 없었다면 모세는 바로의 궁중에서 후계자 수업을 착실하게 쌓으며 안주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때로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십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전도하지 않으니까 경건한 스데반을 순교시켜서 핍박을 받게 하시고 성도들을 뿔뿔이 흩으시사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결국은 모세를 살인자로 만들어서 궁중을 나오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록 모세가 살인이라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도망을 치게 되지만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내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에 대해서 베드로전서 2장9절은 가장 명백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비록 우리는 이땅에 살고 있을지라도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합니다(빌3:20절).

 

 그러면 거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 신분을 무시하고 살면 망신입니다. 신분에 속한 모든 자들에 대한 망신입니다. 신분에 맞게 사는 것은 부담감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망각한 채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망각한 채로 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손가락질인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믿는 사람들이 최소한 자기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살아보니까 다른 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조직적인 방법으로 교묘하게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비난을 겸허하게 받아드려야 합니다. 물론 마구잡이로 비난하는 안티크리스천들을 제외하고서요.

 

 그만큼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신분에 대한 거룩함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주신 신분이 얼마나 존귀합니까? 성도라는 단어가 여러분은 너무 싸구려로 들릴지 모르지만 성도라는 단어는 감히 아무에게나 붙여서는 안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아무에게 성인이라고 부르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성도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자신들에게 붙여진 성도라는 단어가 얼마나 존귀한지를 모릅니다. 너무 흔하게 사용될수 없는 단어를 너무 흔하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목사라는 성직이 얼마나 존귀합니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분을 얼마나 천박하게 사용하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돈벌이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때로는 사람을 속이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때로는 자기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정말 신분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없습니다. 그것은 목사만이 아닙니다. 장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신분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질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게나 고동이나 목사요, 가재나 멍게나 장로며, 쭈꾸미나 꼴뚜기도 권사입니다. 우리는 우리 신분에 대한 거룩함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 얼굴에 먹칠을 하는 우를 범하게 될 뿐입니다. 모세는 자기 신분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지속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과감하게 바로공주의 아들이라는 화려한 명성을 내어던지고 하나님의 왕자로 살기를 작정한 것입니다.

 

 이른바 세상나라의 왕자로 살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나라의 왕자로 살 것이냐에 대한 갈등을 정리하고 하나님나라의 왕자로 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신분에 대한 부담감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신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이 주신 신분을 가지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 생애에 거룩한 부담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소속에 대한 부담감을 가졌습니다(25절)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고 우리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이른바 소속에 대한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책임감이 없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어떤 곳에서든지 책임을 갖지 않는 것은 매우 비굴한 것입니다. 보통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이 소속감이 약하거나 분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하며, 자기가 소속된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책임을 갖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일입니다.

 

 자기가 소속된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 없으면 책임의식은 물론이거니와 질서와 윤리, 도덕도 사라지고, 아무런 관계형성이 안되는 것입니다. 관계형성이 안되는 만남은 아무 의미도 없고, 진실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래 지속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책임감도 생기고, 의무도 다하며, 사랑과 봉사, 헌신과 희생을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도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속감을 갖지 못하면 거룩한 부담감이 사라집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나라 확장에 대한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혹은 하나님나라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당하는데 대한 책임의식도 가져야 합니다. 아무튼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나라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몸담고 있는 교회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가 속한 거룩한 공동체 교회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속한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며,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지 않고 덕을 세울 것인가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가 부흥될 것인가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정상입니다.

 

 그냥 되든지 말든지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식으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은 영적건달입니다. 내가 속한 교회가 아파하면 같이 아파하는 부담감을 가지십시오. 내가 속한 교회가 고통을 당하면 같이 고난에 참여하려는 부담감을 가지십시오. 그것은 성도의 분명한 의무이고 책임입니다. 거룩한 부담감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분명히 문제가 있는 성도입니다.

 

 김연숙씨가 쓴 <흔들리는 신앙, 붙들어 주소서> 라는 글에 22년 동안 미국 이민 교회에서 108번 교회를 옮긴 장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년에 5번 정도, 평균 두 달에 한 번 꼴로 교회를 옮겨 다닌 겁니다. 그는 이상향의 교회를 찾고 찾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옮기고 나면 그 날부터 그 교회의 단점을 찾기 시작합니다. 목사의 허물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자기 눈에 드러난 허물을 서슴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교회주보의 흠, 성가대의 문제, 교인들의 태도 등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108개 교회의 단점을 낱낱이 노트에 적어서 마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병으로 죽게 되자 어느 교회도 장례식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없이 죽기 전 108번째 교회 목사님이 너무나 불쌍해서 장례식을 치러주었답니다. 만일 그가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108개 교회의 허물을 기록한 노트를 펴놓는 다면 하나님은 그의 허물이 적힌 수십 권의 노트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25절은 모세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졌던 것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세상에서 편하게 죄악을 범하며 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다른말로, 하나님나라에 속한 이스라엘백성들과 함께 하고 싶은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비록 그것이 고난일지라도 오히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은 한결같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동거동락하는 부담감을 한번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백성들이 기쁠 때 같이 기뻐했고, 자기 백성들이 아플 때는 같이 아파했습니다. 이것이 책임의식이고 소속감이며 부담감입니다. 지금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있는지요? 주님의 몸된 교회에 대한 부담감은 있는지요?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가정에 대한 부담감은 있는지요? 성도는 자기 조국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처럼 말입니다.

 

(3) 사명에 대한 부담감을 가졌습니다(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리고 성도는 사명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사명에 대한 부담감이 적습니다. 그냥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헌신짝 버리듯이 쉽게 포기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이 사명은 목숨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때문에 생명보다 귀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목사가 가장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사명을 너무 쉽게 생각하거나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사명은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사람이 없어서 나에게 그런 사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사명을 주신 것은 사명을 통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 자에게 보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행한대로 갚으신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26절도 읽어보십시오. 상주심을 바라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어떤 개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정직하게 말하면 목사를 위해 일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헌신짝 버리듯이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한다고 했다가 어느 순간에는 못한다고 하고 요동치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에게든지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분량이 다를 수는 있으나 사명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만일 당신에게 사명이 끝났다면 생명도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사명에 대한 어떤 책임의식이나 부담감이 없다면 당신의 영혼의 상태를 다시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영적으로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영적으로 산자는 사명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이 죽은 자는 부담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신의 영혼의 상태를 정직하게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누구보다 강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한번도 자기 사명에 대한 부담감을 잊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기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기 위해 바로앞에 서야했던 모세를 기억하십니까? 원망과 불평으로 징징거리던 자기백성들을 이끌고 광야40년 세월을 통과할 때 모세의 부담감을 기억하십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아름답게 감당하고 하나님께로 나갔던 모세를 기억하십니까? 모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려는 거룩한 부담감을 한번도 떨쳐버리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믿는 우리에게는 세상이 알 수 없는 부담감이 하나가 분명히 더 있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최소한 당신은 주님의 백성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인 부담감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거룩한 부담감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부담감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나라에 가는 순간까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부담감입니다.

 

 오늘 모세가 우리에게 보여준 거룩한 부담감처럼 우리안에도 신분의 정체성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있어야 합니다. 신분이 확인되면 내가 속한 공동체의 소속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거룩한 부담감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담감을 가집시다. 거룩한 부담감을 가집시다. 할렐루야!!!(2012.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