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타

믿음+행함=구원’을 주장하신 임태수 박사님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서문강목사

새벽지기1 2015. 11. 29. 21:54

로마서 3:21의“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 하였는데,
그 말은‘율법과는 별도로, 곧 율법을 지키느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그 사람의 행위 여부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그 믿는 자에게 전가되는 하나님의 한 의’라는 말입니다.
 



 

 

   
▲ 서문 강 목사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총신대 신대원 졸업
중심교회 담임

 

먼저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에 관해 2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연구를 해 오신 박사님의 경건과 학자적인 열심에 대하여 깊은 존경을 드리는 바입니다. 본인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현직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박사님의 정진이 많은 후학들이나 동역자들로 하여금 복음적인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와 도전을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본인도 박사님의 논리와 주장을 ‘들소리신문’에서 처음 접하고서(본지 1576호 기사) ‘믿음과 행위’의 문제에 대하여 나름으로 성찰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점 주님 안에서 박사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들소리신문사를 통하여 박사님의 연구 논문 파일을 보내주시어 참고하게 하신 박사님의 너그러움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박사님의 주장과 그 논리를 접하고서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기고, 그 의문점은 본인만 아니라 많은 복음 사역자들이나 성도들의 복음 이해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임 박사님의 본의와는 달리 오해될 소지를 방지하는데 기여할 방도를 감히 조심스럽게 생각하다 이 글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렇게 공개서한을 드리오니 양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서한에 대한 답을 주시면 더욱 감사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임 박사님의 진의를 알고 싶어할 많은 동역자들에게 좋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료 됩니다.

 

 

 

 

 

 

 

1. 본인이 이해하기로는 박사님의 주장의 핵심적인 요점은, 구원은 ‘믿음으로만’이 아니고 ‘믿음과 행함 두 가지다.’라는 것입니다. 들소리신문에 기사화된 대로 박사님의 주장은 ‘믿음 + 행함 = 구원’이라는 공식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계십니다.


박사님의 파일 논문 6면에서 이런 대목을 발견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 7:21에서 구원의 조건은 ‘믿음과 행함’ 두 가지다. 루터는 구원의 조건을 ‘믿음’ 한 가지 뿐이라고 말한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마 7:21에서 구원의 조건을 ‘믿음과 행함’ 두 가지로 제시하신다. 그렇다면 누가 틀렸는가? 루터의 ‘믿음으로만 구원 얻든다’는 구원론과 달리, 구원의 조건을 ‘믿음과 행함’ 두 가지로 제시하신 예수님이 틀렸는가? 그럴 수 없다. 예수님이 틀릴 리 없다. 틀린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루터다.”

그리고 박사님께서 루터가 그런 주장을 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해석을 첨가한 논문 말미의 각주(脚注) 1)에서 박사님이 앞에서 한 주장이 일관성 있게 개진되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거기 보면 이렇게 진술하고 계십니다.

“16세기의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파는 등 잘못된 행함을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을 괴롭히고 본질에서 벗어난 교회를 바로 잡고 개혁하기 위하여, 루터는 ‘행함 없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구원 얻는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러나 종교개혁이 성공한 후에는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성경적 구원론으로 되돌아왔어야 했다. 그러나 500년이 다 된 오늘날까지 여전히 ‘행함 없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구원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행함 없는 믿음으로’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만’의 구원론은 하루 속히 시정되어야 한다.”

 

박사님도 아시겠지만, 위의 주장은 종교개혁(루터가 비텐베르그 성당에 95개조항의 항의문을 게시한 1517년을 종교개혁의 시발일로 잡는다면) 이후 500 년간 개신교가 견지해 온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한 이해를 정면으로 공박하는 셈입니다. 교파간의 신학적 강조점이 차이가 있어도, 이후 개신교는 루터의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alone)’는 주장을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한 정당한 이해로 받아 들여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루터 이후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생명처럼 여겨왔던 정통 개신교가 잘못이든지 박사님의 주장이 잘못인지 둘 중 하나입니다. 박사님이 주장이 맞는다면 이는 박사님 스스로 주장하듯이 ‘제 2의 종교개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박사님이 오해한 것이라면 박사님의 주장은 마땅히 수정되거나 철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조건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박사님이 인용하신 자기 진술에서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표지와 열매로 그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

 


2. 제가 보기에 박사님의 글은 ‘의롭다 하심(칭의)’에 대한 개념에 대한 혼란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7에 “하나님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말씀은 로마서가 ‘하나님의 심판 법정’을 염두에 둔 ‘복음 진술’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적인 행위’로서 ‘각인을 판단하시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그 법정에서 내리는 선고의 일종’입니다. ‘의롭다 하심’의 내용은 ‘율법과 계명이 요구하는 바를 완전무결하게 만족하여 네 의가 완전함을 내가 선포하노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력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려면, 다시 말하면 자기의 행위, 곧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려면’ 한 번도 죄를 범한 적이 없어야 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완전무결하게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정의 판단 기준은 ‘절대적 완전’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그러니 누가 하나님의 율법을 스스로 다 준행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정적인 기준으로 의롭다 하시는 선고를 받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시 51:5). 그런 점에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 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한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란 아무리 최선을 다한 것이라도 그 자체를 ‘하나님의 법정적 판단 기준’에 비추어보면, 다 정죄의 대상’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하였는데, 로마서 3장의 문맥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함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는 영예에 미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생은 스스로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인생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당신의 진노에서 구원하시어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목적을 그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세우시고 실행하셨습니다(엡 1:3~6). 죄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오로지 바로 그 아들 안에 있는 구속(救贖, 또는 贖良,
redemption) 안에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로마서 3:21의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a righteousness from God)가 나타났으니”라 하였는데, 그 말은 ‘율법과는 별도로(apart from law), 곧 율법을 지키느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그 사람의 행위 여부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그 믿는 자에게 전가(轉嫁)되는 하나님의 한 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다음 구절에 그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여기서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친다.’는 표현은 ‘믿는 그 사람의 것으로 여겨지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전가되어 그 사람의 것으로 계산되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차별이 없다’한 것은 ‘그 사람의 인종이나 이전 그 사람의 행위나 됨됨이 여부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이 믿음으로 주어짐에 있어서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행위’는
의롭다 하심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공덕’이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을 만한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표지로서의 행위이다.”



십자가의 강도가 예수님을 믿는 즉시 구원을 받은 것도 다 이 진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른 조건(행위)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바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은혜로 값없이, 행위 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들은 그 이후의 연약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다시 ‘정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3~15).

 

3. 어거스틴과 루터가 칭의(稱義)에 대하여 앞에서 말한 것을 옹호하는 일치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박사님은 친히 읽으셨다는 어거스틴의 ‘믿음과 행위에 관하여’(On Faith and works)에서 만난 어거스틴의 진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계십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함은 선행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신칭의 이전에는 율법을 행하지 않아도 이신칭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율법을 행하는 것은 이신칭의 이후에 필요하다.”

박사님이 인용하신 어거스틴의 말은 옳습니다. 그는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분명하게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가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조건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박사님이 인용하신 자기 진술에서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표지와 열매로 그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어거스틴이 ‘이신칭의’ 이후의 성도의 허물과 연약과 죄가 그 ‘칭의’의 효력을 거두어 간다는 식으로 이해한 적이 없었고, 다만 하나님의 구원의 의도와 그 은혜의 열매로서의 행함’이 필요하다 말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을 행하는 것은 이신칭의 이후에 필요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4. 성경 자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후’에 ‘율법의 행위’도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받을 만한 믿음(saving faith)의 표지와 열매로서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박사님의 주장을 위하여 근거로 제시한 마태복음 7:21과 야고보서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위’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두 대목 모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 하면서도 삶의 실제를 통하여는 그 믿음의 거짓됨을 드러내는 자들, 곧 ‘행함의 열매’가 전혀 없는 이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구원과는 상관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3~27에서 예수님은 참 믿음의 표지와 열매로서의 행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함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태복음 7:21의 전후 문맥과 야고보서는 ‘믿음 + 행위= 의롭다 하심’의 도식을 전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여 ‘행위를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 하심의 선고를 위하여 필요한 공로’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칼빈(John Caovin)이나 다른 개혁주의자들의 주석은 한 결 같이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함’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의가 아니다. 도리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표지나 열매로서의 행함이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창세기 15:6에서이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일은 그로부터 약 30여년 뒤의 일이다.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행위’는 ‘의롭다 하심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공덕’이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을 만한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표지로서의 행위이다.’”

 

5. ‘행함’은 ‘칭의(justification)’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의 본분과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에 부합하기 위한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열매와 표지로서 강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 천국백성이 된 자들의 지상행로에 관해서 증거한 산상설교에서 ‘착한 행실’을 강조하십니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 경우에도 ‘행함’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부가적 조건으로 강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자녀다운 거룩한 성품, 곧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서의 변화인 ‘성화’의 열매로서의 ‘행위’입니다(엡 4:11~13). 그 행위도 우리 자신에게 돌려지는 공덕(功德)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열매’입니다(요 15:1~17).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한 것입니다. 그러니 ‘성화의 진전과 열매’가 있어도 우리의 공력으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돌려져야 합니다.

 

6. 교회사의 대표적인 비복음적이고 이단적인 두 대표적인 극단(極端)이 있습니다.


첫째로, 구원의 조건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의 충분성과 완전성을 부인하게 하고 다른 것을 첨가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극단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할례’를 첨가하여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그것은 ‘다른 복음’임을 천명하여 그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저주를 받을 것임을 강력하게 경고하였습니다(갈 1:6~10). 둘째로, ‘그리스도의 은혜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구실로 은혜를 자기 정욕의 도구로 사용하여 믿는 자의 ‘선행’은 불필요한 것 같이 가르치는 극단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사에 나타난 ‘도덕폐기론(무율법주의, Antinomianism)’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들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 5:17). 그 속에 영생을 가지고 있으며(요일 5:12,13), 보혜사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벧후 1:3~4).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걸려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빙자하여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요 자기 행실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 대속의 은혜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유 1:4). 그런 의미에서 복음 사역자가 ‘믿는 사람들의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의 열매와 표지로서 강조해야 합니다. 그 강조가 없는 가르침은 균형을 잃은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행함’의 열매가 모자란 것이
복음을 주밀하고 섬세하게 가르치는 일을 등진 결과라고 저는 믿습니다.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청교도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선한 행실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7. 복음은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로서의 마땅한 본분과 열매로서의 ‘행위’를 강조하고 산출하는 능력입니다.

 

존경하는 임 태수 박사님,
박사님의 믿는 자의 ‘행함에 대한 관심’ 자체는 매우 적절하다 사료됩니다. 그 관심을 우리 모두 소중한 것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행함’을 강조하되, 복음적인 논리와 질서 속에서 바르게 강조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행함’의 열매가 모자란 것이 복음을 주밀하고 섬세하게 가르치는 일을 등진 결과라고 저는 믿습니다.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청교도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선한 행실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행함’의 치료는 ‘행함 자체’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성경)을 통하여 지금도 은혜로 역사하시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로 돌아가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일에 실패하면 그 다음은 다 실패입니다.

우리의 절대적인 표준은 성경이며,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해석의 기준은 교회사를 통하여 옳다 평가된 정당한 개혁주의적인 교리의 체계라고 본인은 믿습니다. 박사님도 같은 의식을 공유하고 계심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