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타

환경보전과 기독교

새벽지기1 2015. 11. 12. 08:31

 
 왜 이 주제를 하는가?


  저가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현재 음료공장에서 환경관리를 맡고 있고 환경분야에서만 10년차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까지 그 분야에 몸담은 것을 토대로 느꼈던 점과 여러 가지 환경보고서, 그리고 지금 나름대로 환경관련 신앙서적을 통해 본 환경보전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일단 저가 하는 일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면 환경관리부분은 법적인 (GO정부) 관계, 민원 등 비정부(NGO)관계, 회사 요구사항, 그리고 물리적 환경으로 공장의 생산활동에서 발생되는 쓰레기, 폐수, 유해물질, 대기오염 등을 관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공장을 운영하면서 또한 공학적인 것을 공부한지라 어떻게 하면 환경을 조금씩 파괴하면서 대량생산의 목표를 달성하느냐에 큰 초점이 주어져 환경보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많은 면에서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환경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말로 원만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어느 정도 범위를 규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환경은 여러 분류가 있지만 크게 3가지 분류로 자연환경, 문화적 환경(예를 들면 언어, 문화, 습관 등), 인적(정신적) 환경(즉, 인간의 의식,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연환경은 크게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자연환경 즉 지하, 지표, 지상의 생물과 관련된 생물과 이를 둘러싼 비생물 포함한 것으로 예로 산, 동식물 등을 말하며, 두 번째로는 생활환경으로 사람의 일상생활과 연관(대기, 수질, 화학물질, 악취)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환경보전이라고 말할 때는 자연환경과 생활환경을 말한다고 볼 수 있으며 저는 주로 생활환경에 관련된 업무를 수행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회의론적인 환경보호주의자였으나 이번 발표를 준비하면서 조금씩 수정되어 정리안된(?) 환경주의자로 바뀌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네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왜 환경보전 필요한가?

 

 (1) 환경오염 문제와 원인


 

  현재 여러 가지 지구적인 문제를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지구적인 문제는 지구 온난화와 오존층 파괴로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지구는 지난 100년동안 0.5℃상승되었고 이 수치중에 최근 10년 동안 0.3℃ 상승되어 영향을 주고 있으며, 2100년에는 2℃상승 해수면 50cm 올라간다고 합니다. 또한 지구 오존층에 구멍이 생겨 특히 남극에 오존층 파괴로 인한 자외선 직접 투입으로 피부암, 백내장 등의 인간피해 뿐만 아니라 동물의 피해도 심각하다고 합니다. 단지 지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옛날 우리가 멱을 감던 소하천이 생활하수로 인해 대부분 하수관거로 변해버렸고 요즈음 같은 경우는 쓰레기 하나 버리기도 대단히 힘든 실정입니다.

 

2004년 지구환경보고서(Worldwatch 연구소)에 따르면 환경오염의 근본적인 원인은 소비와 빈곤이라고 합니다. 1992년 지구정상들이 모이는 리오 환경회담에서는 지탱가능한 개발의 개념을 주창하기도 했고, 2002년 남아공 요한네스버그에서는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소비와 관련된 지구환경보고서의 자료에 따르면 민간소비지출면에서 1960년 4조8천억달러(1995년 달러기준)이었던 것이 2000년 20조달러로 4배 이상 증가하였고 전세계 민간소비지출부문중 미국, 캐나다, 서유럽 60%,를 차지하며 반면 이들 국가의  전세계 인구비율은 12%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전세계의 소비자 계급(7천달러 구매력 가진 사람)은 약 17억명(지구의 1/4)정도 되는데 이런 소비자의 수준이 미주의 수준으로 된다면 심각한 자원고갈 및 환경파괴는 불보듯 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소비를 부추키는 사회에 살고 있으며 성경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소비광고를 통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비의 본질은 나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극빈자들의 삶의 존엄성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소비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소비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소비가 인생 최고의 목표며 정부의 경제정책의 궁극적인 성공여부로 측정될 때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며 이런 의미로 현재 대량소비의 경제학은 21세기 들어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소비도 환경피해를 최소화하고 재화의 무한정 축적이 아니라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이 보장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환경오염으로 깨어진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나타난 환경보전의 현상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2) 환경보전을 위해 나타난 현상


먼저 환경보전의 영향으로 요즈음 환경보전이 최고의 선이고 환경교육이 의무적인 시대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요즈음 우리 아이들도 유치원에서 교육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환경교육을 받고 있고 환경보호와 절약이 선이고 환경파괴는 악이라는 사실을 주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초등학교는 환경일기까지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여름 저희 회사에 경기도 관내 초,중,고등학교 학교신문의 청소년 환경기자단 있어 학교에 환경소식을 전해주고 있음을 보고 얼마나 환경에 관심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교육뿐만 아니라 실제 정부조직이나 비정부조직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70년대초 환경법이 1개인 것이 현재는 40개가 넘는 법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과 비정부기관인 환경보호단체가 현재  200여개 넘는 단체가 있고 종교계도 활발히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교회내에서도 환경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대표적 예가 기독교환경연대로 그린크리스챤(녹색기독교인)이 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홈페이지에서 따온 녹색신앙고백을 보겠습니다.


 

   녹색신앙고백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창조보전을 위하여 일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사랑하사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피로 만물과 화목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셔서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은 모든 피조물이 창조될 때에 보내심을 받았으며 지금도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청지기의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만물을 충만케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임을 믿습니다. 아멘.


 

  이처럼 환경보전운동이 어린 아이들의 교육부터 정부, 비정부기관에 이를 뿐만 아니라 기독교내에서 까지 환경보전운동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와 반면에 환경보전운동의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예로 회의론적 환경주의자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그 대표적인 인물이 덴마크 통계학 대학교수인 비외른 롬보른 교수입니다. 이분은 주장하기를 “지구환경은 줄곧 좋아지고 있다. 종말이 닥쳐온 듯 외쳐대는 환경론자들의 주장은 근거 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우리가 환경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이유는 오로지 먹고 살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문제가 단 하나(먹고사는 일)뿐이었는데, 먹을 것이 남아돌자 세상만사가 다 문젯거리가 돼버렸다(No food, one problem. Much food, many problem). 그 예로 지난 100년 동안 수명은 2배 늘었고, 키가 더 커졌으며, 병으로 고통받는 일도 줄었고, 먹을 것도 풍부해졌는데 사람들은 걱정이 많다. 환경주의자들의 근거 없는 비관론에 현혹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쓸데없는 일에 돈을 쏟아붓고 있으며, 정작 시급한 곳엔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환경주의자들이 사용하는 통계를 꼼꼼하게 봐야 한다고 주의를 준다. 예를 들면 미국의 인구 10만명당 암 사망자 숫자는 1900년 64명에 불과했으나 1950년에는 140명으로 늘었고, 오늘날에는 200명에 달한다. 이를 놓고 환경론자들은 오염 때문에 암 환자가 폭증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암은 ꡐ노인의 질병ꡑ이다. 암 환자의 증가는 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인 것이다. 화학물질 남용으로 정자 수가 감소했다고 호들갑이지만, 이건 남성들 성행위 빈도가 잦아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환경오염의 문제와 원인 그리고 나타난 환경보전운동에 대한 상황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환경에 대해 또한 생각해 볼 문제는 시대적, 지리적 배경에 따른 환경보전의 상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환경법은 없었겠지만 환경오염에 대한 처벌이 있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취수구에 빨래터에 오줌 똥싸면 곤장 몇 대 등) 또한 과학적인 요구 및 환경사고에 따라 환경보전방향이 정해지기도 하고 지역마다 환경분야의 요구사항이 틀리기도 합니다(예;시화공단 악취) 또한 나라마다 환경분야에 대한 관심도 다양하고 다릅니다.(예; 미국과 우리나라의 차이점)

  그럼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중요한 것은 이런 환경보전이나 사상에 대해 근본적인 생각이 무엇인지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환경보전운동의 근본적인 사상들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2. 이 세상에서 환경보전운동의 근본적인 생각이나 사상은?


 
먼저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환경과 인간의 죽음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물활론자(Animists: 모든 만물에 생명이 있고 영혼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 근거하거나 범신론(pantheism : 신과 전우주를 동일시하는 철학이나 사상)에 의거한 환경보전운동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에도 영혼을 부여하여 저 나무를 짜른다면 좋지 못한 우환이 임한다든지 아니면 자연에 인간의 감정을 투영하여 낭만적으로 이끌어서 모든 자연을 인간과 구분없이 동일시하는 경향 등을 말합니다. 이러한 경향의 문제점은 자연의 부정적인 영향(홍수, 해일, 지진, 인간에 대한 공격성 등)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고 오히려 인간의 지위를 높이기 보다는 항상 인간을 비인격적이고 낮은 자리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범신론은 통일된 이미지를 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개별적이고 다양성에 대한 답을 줄 수 없고 인간의 존엄에 대한 기반이 너무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정치적인 이유, 집단적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환경보전운동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환경보전운동이 전문성을 가지고 추진하기 보다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을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변질되어 가는 경향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환경운동가는 말하기를 진정한 환경보전을 위한 운동을 할려면 세가지 즉 전문성, 추진력(리더쉽), 재정적 능력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거의 우리 사역자 수준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과연 성경적으로 환경보전운동에 대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까요?


 

3. 성경적인 환경보전운동



  먼저 성경적인 환경보전운동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기 전에 기독교가 환경의 적이라고 비판받은 사상 두 가지를 프란시스 쉐퍼 박사의 설명을 빌어 설명할까 합니다. 첫 번째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개념의 영향으로 오직 상층부 즉 천상적인 것들 오직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에 가는것 에만 관심이 있다. 물질 자연현상은 열등한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고전적인 증거를 찾는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경향이 있고 그들은 아름다운 높은 산을 보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라는 생각입니다. 자연 그 자체는 가치가 거의 없는 단지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학문적인 증거로만 사용된다는 사상으로 인해 최근 기독교가 환경파괴에 앞장서 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두 번째는 다스림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성경 창1:2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에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온 땅에 기는 모든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에서 다스림에 대한 견해를 자연에 대한 무제한적인 착취개념으로 이해하여 기독교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반대로 환경보전에 대한 비성경적인 견해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초창기 기독교환경운동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로 사용했던 것은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후 열두광주리를, 칠병이어 기적후 일곱광주리 모은 사건에서 예수님이 환경을 생각해서 음식물쓰레기를 남김없이 처리코져 하였다는 생각입니다. 글쎄 성경적인 좋은 예는 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SFC에서 펴낸 기독교와 환경이라는 책에서 환경보전을 위한 교회의 역할이라는 글을 보면 환경보전의 신앙적인 근거를 설명하실 때 성자 하나님에 대한 내용에서 요3:16 의 세상이 인간만이 아니고 자연세계까지도 사랑을 하신 것으로 따라서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세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음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 몸같이 사랑해야할 지평이 모든 피조세계까지 확대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의 설명을 통해 모든 생물이나 무생물에게 성령은 사랑으로 임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환경보전에 대한 신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까지 확대된 개념의 성부, 성자의 역할과 행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가 나름대로 찾은 성경적인 예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의 환경의 오염과 인간의 죽음이라는 책인데 거기서 조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주 구원론에 대한 강의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환경보전을 설명할려고 했으나 조금 힘들다는 것을 느끼는데,


 

예를 들면


 

      창조             타락                 구원                     종말


 

 깨끗한 환경      오염된 환경        일부 복원된 환경      완전히 복원되고 처음
                                                                            보다
 좋은 환경


 

자연과 인간관계원만  자연과 인간의 단절  자연과 인간의 관계회복     완전한 회복


 

 이처럼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프란시스 쉐퍼박사는 창 1:26의 다스림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남자가 여자를 다스림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다스림에 대해 폭군처럼 다스린다는 개념보다는 사랑으로 바르게 다스리듯이 타락한 인간은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여전히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바르게 지배권을 사용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타락으로부터의 5가지 소외(분리)의 회복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인간분리, 인간 자신으로부터의 분리,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 자연으로부터 인간분리, 자연으로부터의 자연의 분리를 그리스도가 오시는 그날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은 심미안적인 가치를 존중하여 동물과 달리 사람에게는 미적인 감각을 가진 존재로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만이 예술작품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올바른 태도로 자연을 접촉하면 자연속에 보전된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에 대해 경제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가치들도 덧붙여서 자연을 대해야 된다고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폐수처리목적 환경법 달성도 있지만 좀 더 심미적으로 나은 폐수처리를 위해 노력해야 된다고 느낍니다.

   어쨌거나 그럼 환경보전을 요구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4. 환경보전이 요구되는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할 일.


 

  일단은 국가가 법에서 요구하거나 정부의 일반적인 요구사항을 먼저 준수해야 합니다. 정부기능은 알다시피 이 세상의 질서보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아니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대체로 넓은 의미에서 보면 사회안정을 위해 노력하기에 경제적, 심리적, 지적으로 사회적 환경조성이 원만하게 돌아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능이 유지되도록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이에 동참해야 하며 이런 사회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교회의 사명인 복음이 잘 전파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환경친화적인 교회가 되도록 조금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환경친화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 부지런하고, 희생해야 하며, 재정적으로도 아주 넉넉해야 되고, 또한 조급함 버려야 된다고 합니다. 저희 교회 형편상 완벽한 환경친화적인 노력은 어렵지만 실천적인 면에서 조금씩 해나가면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예를 들면 수련회를 교회에서 보다는 야외 들판에서 하면 조금이라도 아이들과 우리에게 자연에 대한 심미적인 관점을 심어줄 수 있다고 생각되며 교회생활 및 가정생활에서도 요즘 음식물쓰레기에 대한 관리요구가 많은데 그에 따른 실천으로 부응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기독교와 환경이라는 책에서는 교회가 환경보전을 위해 더욱 많은 일을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보는데 현 교회의 구역예배조직을 지역 환경실천조직까지 확대하자, 환경주일 및 환경전담부서를 두자는 등 상당히 환경운동가 다운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교회의 조직을 사회운동의 개념의 일환으로 조직된 단체로 보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기독교 환경운동가나 방향을 잘 관찰하고 비성경적인 주장이나 복음에서 벗어난 행동 및 주장에 대한 어느 정도 비판도 해야 하며 또한 교회내에 환경운동만이 절대적인 선이라는 개념에서 어느 정도 콤플렉스를 벗어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운동, 환경신학도 좋은 일이며 따라야 하나 우선순위에 있어서는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신학이 우선한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균형이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결론


  환경보전에 대해서 아직 정리도 되지 않고 그렇다고 환경보전에 대한 마음이 가슴으로 뜨겁게 불타올라 노력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나마 환경보전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에서 조금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이번 준비로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부족하지만 끝까지 듣고 읽은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환경보전을 왜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까? 우리와 후손들이 살만한 세상이 되도록 단지 우리가 오래살고 후손도 오래살기 위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후손들이 좀 더 환경이 안정적인 곳에서 신앙생활과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러나 또한 한 가지 우리가 인식해야 될 것은 우리가 현재를 위해 이렇게 노력은 하고 있지만 우리의 세상은 죽음과 심판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계 21:1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이것은 영적인 상황만이 아니라 반드시 물리적인 환경의 변화도 이야기한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잘 보전해야 하지만 이 세상은 심판과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율배반적이고 긴장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다름아닌 프랑스 법학자 자크 엘룰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마침 죄와 은혜의 긴장속에 있듯이 말입니다.


 

  남의 이야기이지만 매우 공감되는 이야기로 맺을려고 합니다. 자크엘룰의 세상속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인데 마지막부분에 적혀 있는 글을 읽을까 합니다.


 

  과거 콘스탄틴과 루이 14세 치하에 교회는 국가와 타협함으로 국가에 종속되었으며, 19세기 교회는 자본주의와 타협함으로 그 순수성 상실하고 과학과 타협함으로 계시된 진리를 빼앗겼다. 민족주의 대두하는 시대 민족주의 교회로 국가의 정치가 권위주의적인 방향으로 옮기며 권위주의적인 교회로 식민정책에 호의적인 시대에는 교회도 나름대로 신학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식민정첵에 옹호하고 때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옹호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타협의 유혹을 받는 교회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거나 세상의 해결책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독자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여야 한다. 교회가 이러한 모습을 보이게 될 때에야 비로소 사회적 운동으로 떨어지지 않으며 성령께서 주시는 힘을 소유하고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의 적들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독자적인 길을 버리고 자신들이 제시하는 길을 따르도록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교회가 그와 같은 유혹에 굴복하는 순간부터 교회는 세상의 장남감이 되어 세상 권세에 복종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기도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아무도 가르칠 수 없는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시기를 간구해야한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구원의 길일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요.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기 전에는 발견할 수 없는 길이며 또한 인간의 힘에만 의지할 경우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길이다.


 

감사합니다.



 

참조도서 :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쟈크엘룰)

                환경오염과 인간의 죽음(프란시스 쉐퍼)

                2004 월드와치보고서(UN)

                기독교와 환경(SFC)



 

박영돈 목사님 정리

환경보전 왜 해야하나? 크게 3가지 관점이 있음.

 

1. 하나님의 형상에는

① 하나님과의 관계

② 이웃과의 관계

③ 자연과의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회복에는 본 3가지의 개념이 들어 있다.


2. 구속의 관점 :

   하나님의 구속은 인간의 구원뿐 아니라 우주만물을 회복케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우주적 구원이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중심이 되게 하신다.(엡1:10, 골1:16) 그래서 우리의  신앙비젼이 넓어져야 한다. 인간의 영혼구원뿐만아니라 온 만물을 구원하는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


3. 성령의 관점 :

  성령님께서 세계를, 환경을 구체적을 새롭게 하시며 보전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역할은

  ① 교회에서 성령의 사역이 역동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지구환경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② 구체적인 책임을 다해야 한다.

    새하늘과 새땅은 이 지구와의 연속성상에 있다. 이 땅을 보전하려는 노력은
    영원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부분적인 보전만 가능할 뿐이지 마지막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된다.

  개인의 변화(영혼의 변화) → 공동체변화(교회의 변화) → 사회의 변화
  → 우주적인 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