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피 흘려 사신 교회의 참 모습”

새벽지기1 2015. 10. 23. 06:12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뜻밖에 김명혁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샘교회 창립예배(2011년 3월 둘째 주일) 설교 원고를 발견했습니다. 김명혁 목사님은 나의 은사님으로 은퇴 이후에도 제자들이 섬기는 작은 교회를 순방하시며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말씀샘교회 창립예배에도 오셔서 축복해주시고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기쁨으로 옮겨 싣습니다.)

  

오늘 말씀 샘 교회의 창립을 축하드리면서 “피 흘려 사신 교회의 참 모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이런 제목으로 설교하기는 평생 처음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너무 세속화되고 너무 인간화되고 너무 세상 유행을 따르기 때문에 “피 흘려 사신 교회의 참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정병선 목사님과 새로 설립하는 말씀 샘 교회를 생각하면서 “피 흘려 사신 교회의 참 모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바로 지난 목요일 오후에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교회가 이 세상에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람들의 손으로 세운 건물이 아닙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세운 성막도 아닙니다. 금 은 보석으로 세운 화려한 성전도 아닙니다. 교회는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시므로 세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28).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 11,12,14).

 

교회는 반드시 건물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피로 죄 사함과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과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신자들이 바로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시는 예수님에게 붙은 교회의 부분들이고 교회의 구성원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2). 즉 교회는 주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신자들을 가리키고 신자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신자들이 교회의 부분들이고 교회의 구성원들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이 죄 사함과 구속함을 받은 것은 그래서 교회가 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다고 사도 베드로도 지적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그러면 이제부터 “피 흘려 사신 교회의 참 모습” 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피 흘려 사신 교회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진 우리들이 지니며 나타내 보여야 할 교회의 참 모습이 무엇입니까? 크고 화려한 교회당 건물입니까?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을 지닌 대 교회의 모습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초대교회 시대에 존재했던 교회들은 힘이 없는 작은 교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처음에는 3천여 명이 모인 큰 교회였지만 사실은 화려한 교회당도 없었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을 지니지도 못했습니다. 잡아가면 감옥에 붙잡혀갔고 돌로 치면 맞아 죽었고 박해가 일어나면 이리로 저리로 피난을 갔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행8:1-4). 이것이 초대교회의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생명을 다 바쳐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며 섬기는 주님의 종이 되었고 교회의 일꾼이 되었는데 사도 바울은 교회의 한 부분이 된 자기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자기는 이제는 예수의 흔적과 십자가의 흔적을 자기 몸에 지니게 되었고 예수의 죽으심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그리고 자기는 이제부터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피 흘려 사신 교회가 지니고 나타내 보여야 할 교회의 참 모습이 무엇입니까? 올해 101세가 되시는 방지일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소리를 중계하는 중계소인데 지금 너무 사람들의 소리가 많이 들리고 있어요.” 너무너무 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 소리를 중계하는 중계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의 흔적을 나타내 보이는 전시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의 피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피의 흔적을 볼 수 있다면 그런 교회는 참된 주님의 교회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의 흔적을 다 알 수도 없고 다 나타내며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가장 충실한 주님의 종이었고 가장 충실한 교회의 일꾼이었던 사도 바울이 자기 몸에 지녔던 예수의 흔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므로 설교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수고와 고난을 많이 당해도 그리고 피를 쏟으며 죽어도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고백하면서 자기는 자기 몸에 다섯 가지 십자가의 훈장을 지니는 것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 그리고 자기 몸에 지니기를 기뻐하는 다섯 가지 십자가의 훈장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저는 사도 바울이 자기 몸에 지니기를 기뻐했던 다섯 가지 십자가의 훈장을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조금이라도 몸에 지니고 나타낼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바랄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십자가의 훈장을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께서 지니셨고 성 프랜시스가 지녔고 이기풍 목사님이 지녔고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몸에 지니며 나타내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초기의 조선교회가 이 다섯 가지 훈장을 조금이라도 몸에 지니며 나타내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섯 가지 훈장은 다음과 같은 훈장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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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약한 것들이라는 이름의 훈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약한 것들이라는 훈장을 지니는 것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몸도 마음도 모든 것이 약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약해진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몸에 불치의 병도 지녔고 때리면 맞고 죽이면 죽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처럼 약해지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때리면 맞고 죽이면 죽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도 이기풍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한경직 목사님도 초기의 조선교회도 모두 극도로 약해졌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흔적을 지닌 교회의 참 모습이었습니다.

 

둘째는 능욕이라는 이름의 훈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능욕이라는 훈장을 지니는 것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사도 바울처럼 능욕을 당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고후11:23-25). 사실 예수님처럼 능욕을 당하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에게 조롱을 당했고 침 뱉음을 당했고 멸시와 무시와 짓밟힘을 당했습니다. 성 프랜시스도 이기풍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한경직 목사님도 초기의 조선교회도 모두 능욕을 당했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흔적을 지닌 교회의 참 모습이었습니다.

 

셋째는 궁핍이라는 이름의 훈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영광도 부귀도 명예도 평안도 모두 버린 가난과 궁핍이라는 훈장을 지니는 것은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사도 바울처럼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해진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처럼 하늘 영광과 부요함을 버리시고 가난과 궁핍이 되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고후8:9). 성 프랜시스도 이기풍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한경직 목사님도 초기의 조선교회도 모두 극도로 가난했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흔적을 지닌 교회의 참 모습이었습니다.

 

넷째는 핍박이라는 이름의 훈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핍박이라는 훈장을 지니는 것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사도 바울처럼 핍박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고후11:23-25). 사실 예수님처럼 핍박을 당하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와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을 향해서 이렇게 물으시기도 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신 순간부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아니 부활하신 후에도 인간들로부터 핍박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 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15:20). 성 프랜시스도 이기풍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한경직 목사님도 초기의 조선교회도 모두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흔적을 지닌 교회의 참 모습이었습니다.

 

다섯째는 곤란이라는 이름의 훈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곤란이라는 훈장을 지니는 것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사도 바울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는 것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5). 사실 예수님처럼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고난을 많이 당하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13:12). 성 프랜시스도 이기풍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한경직 목사님도 초기의 조선교회도 극도의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흔적을 지닌 교회의 참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오늘 교회 설립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좀 편안하고 즐거운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너무 심각한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 오후에 갑자기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약함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는 훈장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주님의 흔적을 몸에 지니려면 주님께서 지니셨던 주님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지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병선 목사님은 그동안 많은 고난과 아픔과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고난과 아픔과 슬픔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경험이고 자질입니다. 말씀의 샘이 도서관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아픔과 슬픔을 체험한 사람들의 가슴과 아픔과 슬픔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여기 오늘 세워지는 말씀 샘 교회에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경험하고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 앞에 엎드리므로 하늘의 긍휼과 사랑과 위로를 받고 그리고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생생하게 전하는 주님의 신실한 일군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