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샘터> 교회 창립의 변
대구성서아카데미(이하 ‘다비아’, http://dabia.net) 온라인 커뮤니티가 이제 서울 오프를 중심으로 교회를 시작하려고 한다. 눈길을 주는 곳마다 교회가 널려 있는 마당에 또 무슨 교회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크게 틀린 게 아니다. 한국 교회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현재 운영 중인 교회도 가능한 대로 줄여나가는 게 옳다. 아무리 전도와 부흥을 외친다고 하더라도 머지않아 문을 닫는 교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마당에 다비아는 왜 새롭게 교회를 시작하려고 하는가?
대답은 핵심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소극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것이다. 먼저 소극적인 대답부터 시작하자.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싶지 않지만 더 이상 출석하고 싶은 교회가 없는 사람들에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이 첫째 대답이다. 영혼을 의지할만한 교회를 찾기 힘들다는 말은 보기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사람이 너무 까칠해서 그렇지 조금만 마음을 열어두면 어느 교회 공동체에서나 영적 안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영혼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세미한 음성에 민감한(또는 과민한) 사람들은 오늘과 같은 일반적 행태의 교회에서 영적 만족을 누릴 수 없다. 그래서 교회를 뛰쳐나간 사람들이,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할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일종의 영적인 노숙자들이다. 나도 그런 축에 낀다. 그들을 위한 마지막 예배 공동체를 마련한다는 것이 바로 이번 교회설립의 첫 번째 취지이다.
적극적인 대답은 전통적 영성과 건강한 신학에 근거한 교회 공동체의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 지금 한국의 대중적인 교회에는 영성도 없고, 신학도 없다는 말이냐 하고 말이다. 더 나아가서 성령의 강력한 도우심으로 한국교회가 이렇게 발전한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주장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 속사정은 진술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한국의 보수적인 신앙 형태를,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수구적 신앙 형태를 정통으로 여긴다. 대중적인 교회가 토대하고 있는 영성과 신학은 구체적으로 영국의 청교도 신학과 미국의 부흥운동과 오순절 신앙의 결합이다. 교파가 어디에 속했건 한국의 거의 모든 개신교회는 이 세 가지 성격이 혼합된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런 전통은 세계교회의 메인 스트림(주류)이 아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일시적으로 일어났던, 일종의 소종파적 영성과 신학이다. 지난 2천년의 전체 기독교 역사와 지금 21세기 한국의 역사에서 설득력이나 현실성이 크게 떨어지는 이런 신앙적 행태가 한국교회를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이게 모두 주님의 은혜라고 말한다면 더 할 말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교회의 긴 역사와 성서와 신학의 중심에 바로 서서 복음을 선포하려고 애쓰는 목회자들은 소외당하고 있다.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목회가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세속적 기복주의와 천박한 상업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교회 현실 앞에서 그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당연하다. 이들에게는 주변에 따르고 싶은 어른도, 선배도, 또한 함께 연대하고 싶은 동지도 없다. 의식이 있는 신자들도 실제로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잘 알고 있고 나름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평신도들도 실제로는 몸을 사리거나, 대중적 교회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할 뿐이다. 어느 교회나 거기서 거기니까 신앙 활동에서 선택지가 많은 대형교회에 가나는 게 현실적이라고 말이다. 그들의 현실적인 선택을 뭐라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 의식 있는 목회자나 신자나 모두 지금은, 마치 현대인들이 거대한 글로벌 시장 만능주의라는 홍수에 떠밀려가듯이, 그런 대세를 따르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패배주의이다. 패배주의라는 악령이 지금 한국교회의 안마당을 득의에 찬 모습으로 배회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교회만이 아니라 그런 교회의 문제를 예언자적 영성으로 비판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할,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한국교회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신학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지금 신학생들은 신학공부에 관심이 없다. 학술동아리에는 학생들이 모이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기존의 교회가 관심을 갖고 있는 그런 프로그램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씨씨엠을 부르거나 거지 전도단을 꾸리거나 단기 선교, 또는 영어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리 등에만 몰린다. 그들을 가르치는 신학자들의 상황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교회는 신학자들의 말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신학자들도 한국교회의 문제를 신학적인 양심으로 비판할 생각도 없고, 용기도 없는 것 같다. 한국교회의 운명은 종교적 카르텔을 맺어 교권을 장악해 내가는 대형 교회의 담임 목사들 및 그들과 영합하는 대다수의 목사들에게 전적으로 좌우되고 있는 형편이다. 생각이 있는 목사들의 이유 있는 외침은 찾아보기 힘들며, 어쩌다 들려도 곧 다른 함성에 묻혀버린다. 이런 악령의 지배로부터 우리는 언제 자유로워지겠는가?
무엇이 다른가?
이제 우리가 시작하게 될 교회는 기존의 대중적인 교회와 달리 신학적인 정통성과 영성과 종말론적 역사변혁을 추구하면서도 역동적인 공동체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게 될 것이다. 이것은 출애굽과 바벨로 포로귀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자유를 향한 출항이다. 그런 교회가 몇 개라도 있어야 100년 후의 우리 후손들에게 최소한의 체면이 서는 게 아닐는지. 우리만 건강하고 다른 데는 모두 썩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올곧게 지향하는 공동체가 아무 데도 없다는 게 아니다. 곳곳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 소위 ‘남은 자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하게 건강하거나 완전하게 부패한 교회가 손금 보듯 구별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지향성에서만은 분명히 다르다. 지향성이 다르면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주님의 가르침에서 보듯이 결과도 역시 다르다. 새로 시작할 교회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세 가지로 대별해보자.
1) 우선 극복해야 할 요소들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성서 문자주의, 성속 이원론, 영육 이원론, 가부장주의, 기복주의, 율법주의, 교파주의, 레드 콤플렉스, 타종교에 대한 적대감 등등. 2) 소중히 지켜나가야 할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교회의 전통적 예전, 에큐메니칼 정신, 사도신경에 근거한 신앙고백, 종교개혁 전통 등. 3) 창조적으로 열어가야 할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교회 운영의 민주화, 민족의 통일지향성, 세상을 향한 창조 영성 등. 위의 내용을 줄인다면 율법 신앙으로부터 복음 신앙으로, 교회의 조직으로부터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역사의 현상유지(atatus quo)로부터 종말론적 변혁으로 기독교 영성의 중심을 이동한다는 것이다.
위의 요소들은 큰 방향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손에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구체적인 사안을 두 가지만 거론하겠다. 첫째, 한국교회에서 십일조 헌금이 어떻게 오, 남용되고 있는지는 너무나 잘 알려진 것이라서 긴 말을 하지 않겠다. 그래도 우리 교회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짤막하게나마 입장을 밝히는 게 좋다. 십일조 헌금을 신자들의 절대적인 의무 사항으로 강요하는 것은 성서적이지도 않고 신학적이지도 않은 일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것은 마치 종교개혁 시대의 면죄부 제도와 다를 게 없다. 십일조 헌금은 종교세와 국세가 구분되지 않았던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잠정적으로 운용되던 제도이다. 그것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성서구절도 그렇게 많지 않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담은 사도들의 서신에 한정해서만 본다면 십일조 제도는 아예 성립되지도 않는다. 복음서에 희미한 그림자로만 남아 있는 언급도 십일조 자체라기보다는 다른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인용된 것뿐이다. 세계 교회에서도 십일조 헌금을 우리처럼 신앙의 절대적 기준으로 가르치는 교회는 없다. ‘십일조 없는 교회!’는 우리 교회의 내적 정체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둘째, 지난 수년 동안 군대체입법 문제가 한국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한국의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한 ‘한기총’은 이것을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이 법률이 결국 ‘여호와의 증인’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를 끌어들였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강단에서 외치는 사람들이 평화 원리주의적 입장에서 군생활보다 더 힘든 사회봉사를 통해서 군복무 의무를 대신하겠다는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공개적으로 방해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역사를 잘 모르는 데서 나오는 어리석음이며, 결국 자신들이 종교 패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다. 우리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 지향적 영성을 교회 밖으로 확장시켜 나갈 것이다.
위에서 우리 교회가 대중적인 교회와 구별되는 두 가지 사안을 구체적으로 거론했다. 하나는 교회 안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밖의 문제이다. 어디 이것만이겠는가. 다만 상징적인 차원에서 두 가지만 언급했다. 여기서의 핵심은 교회 안과 밖의 우상과 투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피조물을 창조자처럼 섬기는 종교 행태가 오늘 신앙생활에서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자기 자신이, 또는 교회 자체가 우상이 될 때도 많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잠시 기분이 좋아서 우쭐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교회가 실제로 가능한가?
아무리 뜻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런 교회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냥 또 하나의 특색이 있는 교회로 남을 수는 있지만 대중적인 역동성을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염려가 그것이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미 무게의 중심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한국교회 안에서 그 중심을 바르게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앞에서 거론한 것처럼 많은 의식이 있는 기독교인들이 패배주의에, 더 나아가서는 냉소주의에 빠지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 염려한다고 해서 문제가 우리 뜻대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 역사를 이끌어가는 분이 바로 성령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자신들의 행위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으리라. 우리의 생각이 성령의 뜻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릴 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 아닌가.
여기서 관건은 우리가 이런 성령의 활동에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맡기는 데서(만) 기쁨과 평화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이냐, 혹은 아니냐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진리와 생명의 영이며, 부활과 종말의 영인 성령과 영적으로 호흡하는 데서만 우리에게 참된 자유가 확보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로 확실하게 알고 있느냐, 하는 게 여기서 중요하다. 그런 자유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내일을 결코 염려하지 않는다. 이미 ‘지금 여기서’ 궁극적인 생명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 이외의 것이 무슨 문제가 되랴!
위의 글을 읽고 <서울샘터> 교회의 성격에 대해서 몇 가지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이 교회가 대안적 성격을 띠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정통교회이다. 세계교회와 같은 길을 가는 보편교회이다. 또 다른 오해는 이 교회가 지나치게 지성적인 성격을 띠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지성이 아니라 영성이다. 건강한 신학적 영성에 기초한 정통 교회라는 게 이 교회의 정체성이다. 이런 점에서 이 교회는 지식인들만이 아니라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였으면 한다. 기독교 영성을 전통과 역사에서 찾는 그 신학적 특성이 생생하게 살아나 이 사회의 여러 소수자들도 기꺼운 마음으로 공동체의 일원으로 동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우리 <서울샘터> 교회가 어떤 형태의 교회로 자리를 잡을지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은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유이면서 동시에 불안이다. 모든 게 열려 있어서 자유롭지만 동시에 아무 것도 손에 들어온 게 없어서 불안하다. 자칫하면 신앙적인 방종에 빠지거나 영적으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며 이제와 영원토록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하나님으로 살아 계시고 이 세상을 다스리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바라고 있다면 그런 미혹에 빠지는 일은 없으리라.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200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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