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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이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1)-(2)

새벽지기1 2015. 7. 4. 07:21

 

 

하나님이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1)

 

 

예로부터 지금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굶주림과 질병, 홍수와 지진 같은 천재지변이 빈번히 발생하여 인류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어왔다. 14세기에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어 유럽 인구의 ⅓을 죽음으로 몰아넣는가 하면,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5천만 명이 살해되는 비극이 초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76년에 중국 당산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24만 명이 떼죽음을 당했으며, 캄보디아에서는 폴 포트가 정권을 잡은 후 75년부터 3년 8개월간 양민 200여만 명을 학살하였고, 오늘날 제3세계 국가의 주민들이 연간 1800만 명이나 굶어 죽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참을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선 대규모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침묵과 무위(inaction)로 일관하시는 것 같은 느낌에 인간들은 전율을 느끼며(시 10:1,44:23,24), 비극적인 현실의 절망감 속에서 삶을 저주하기에 이른다(욥 3:1) 과연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선하신 분이라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에 어찌 이렇게 비극과 슬픔이 넘칠 수 있단 말인가? 악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징벌의 차원에서 이해되지만,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들이 무고하게 고통을 당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런데 더욱 난감한 문제는 악한 사람이 번창하고(렘 12:1), 선한 사람이 큰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시 73:1-15)

 

이렇듯 선악(善惡)에 대한 상벌(賞罰)의 배분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의문이 하나님의 공의성에 대해 회의를 불러 일으켜(합 1:13; 말 2:17,3:13-15), 기독교인에게 심각한 긴장감과 신앙에 장애물을 제공한다. 더욱이 고통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유력한 논증에 대해, 모든 기독교의 변증적 이론과 해석들은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납득할 만큼 설득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한 듯 보인다. 과연 고통에는 이성적으로 풀리지 않는 하나님의 숨겨진 의도가 있는가?

 

1. 이성을 초월하는 고통의 신비

 

신학적으로 고통은 두 종류로 분류된다. : 지진·홍수·질병 같이 인간의 의지 또는 행동에 관계없이 자연 현상에 의한 고통을 '자연 악'(natural evil)이라고 부르며, 전쟁·억압·범죄 등 인간의 불의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을 '도덕 악'(moral evil)이라 말한다. 물론 이 둘은 긴밀하게 연결되기도 한다. 프레온 가스(CFC)가 오존층을 파괴하여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계속되는 지하 핵실험이 지진의 빈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홍수나 지진 같은 '자연 악'도 인간이 저지른 '도덕 악'과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악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이 고백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상과 정면충돌을 일으키는 문제로 부각된다. 하나님이 전지(全知)하시다면 악을 피하는 법을 아실 것이고, 전능(全能)하시다면 악을 없애실 수 있으며, 선(善)하시다면 악이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러한 문제 설정과 더불어 철학자 흄(David Hume,1711-1776)은 하나님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악을 방지하기 원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다면, 그는 무기력하다. 능력은 있으나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심술궂다. 능력도 있고 그렇게 할 의향이 있다면, 악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래서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이러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능성이라는 고전적인 개념을 거부하거나(Finitism, 限定論),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인간 이성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악에 대한 개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믿는 신앙을 버리거나 기독교에 대하여 적대적이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여 괴롭히는가? 본회퍼의 말대로 반드시 역경 속에서가 아니라 번영과 즐거움 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할 수는 없는가?

 

그러나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상에 고통이 전혀 없다고 상상해 보자! 고통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세상에서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살인자의 칼이 살해 직전에 종이칼로 변할 것이며, 은행에서 5억 원이 도난당하면 자동적으로 5억 원이 채워져서 살인이나 사기 등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도덕 악이나 윤리가 존재할 수 없다. 즉 남에게 해를 주는 그릇된 행위를 생각할 수 없다면, 그릇된 행위와 구별되는 옳은 행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유로운 응답을 통해 하나님이나 마귀를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라는 개념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 사이에 조화를 깨뜨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2. 고통에 숨겨진 하나님의 의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연 악'과 '도덕 악'을 인류역사 속에 '허용'[permission, 하나님은 죄를 허용하셨지만(허용적 의지), 죄의 원인자(작정적 의지)는 아니시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섭리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고통은 하나이지만, 성경은 결과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는 인간을 구원하려는 소명으로서의 고통이다. 이것은 모든 소망과 행복을 세상에 두고 있는 불신자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여, 저들의 가련한 모습을 발견하게 한 후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쇠 풀무(철을 녹이는 용광로) 곧 애굽"(신 4:20; 사 48:10; 렘 11:4)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바로의 탄압이다(출 1:1-2:25). 그들에게 바로를 통해 혹독한 시련이 없었다면, 가나안 땅을 열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고통이지만,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통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거부하여 구원의 기회를 놓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 고통은 하나님이나 마귀 중 양자택일 할 수 있는 동기를 인간에게 부여한다. 이 부분에 대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2)>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하려고 한다.

 

두 번째는 성도들을 연단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고통이다. 이러한 고통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을 때, 혹은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세상 줄을 끊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훈련하기 위한 사랑의 채찍인 것이다(시 34:19). 이러한 고통은 하나님이 각별하게 대해주시는 사랑의 손길로써,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과정에서 재난을 잘못된 인간 삶의 교정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래서 선으로 익도록 이끄신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을 들 수 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의 죄를 멈추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고통의 과정을 통하여(by the process of affliction to remove the dross, the Amplified Bible) "연단"(렘9:7)하기로 작정하셨다. 결국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거치면서 그들은 고통가운데서 연단 받아 그 이후 결코 우상을 섬기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 문제는 「연단의 절대 필요성」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세 번째는 악인의 형벌을 위한 심판으로서의 고통이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하여 당장 악인을 심판하거나(삼상 25:38; 행 12:20-23), 혹은 죄악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두어 악으로 익게 하신다.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성이 잘 드러난다. 이에 대해 루터는 악인이 잠시 누리는 번영을 축복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회개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통을 끝까지 회피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기회가 점점 희박해지기 때문이다.

 

루터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시는 가장 중한 벌은 멸망할 때까지 죄짓도록(악으로 완전히 익도록) 내버려두는 일인 것이다(롬 1:28-32). 실제적인 예로 노아의 홍수(창 6-8)이전 에녹이 의를 전파하였으나(유 14,15) 더 이상 저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벧전 3:20) 하나님께서 심판 날까지 내버려두었다가 모두 멸망시켰다(욥 21:7-26; 시 37:1-40,92:7). 이 문제는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잔인한 분인가?>에서 다룰 것이다.

 

이렇듯 인류역사 전체를 통하여 인간을 다루기 위해 허락하신 고통은 4차원적 초 입방체 안에 하나님의 전능성·사랑·공의성과 더불어,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3차원적으로 나타난 현상만 가지고 인간 중심적이고도 불완전한 이성적 관점에서 서로 모순된 것처럼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고통을 통해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는 고통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인간으로 하여금 중도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나 마귀 중 한쪽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수 24:14,15; 약 4:4-8). 그러므로 고통은 곧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은 아닌 것이다.

 

“主께서 人生으로 苦生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本心이 아니시로다”(애 3:33)

 

 

하나님이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2)

 

 

하나님이 쓰신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깨어짐의 쓰라린 과정을 겪었다.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도 그런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깨어짐이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모든 소망을 포기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필수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 글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땅에 심겨진 씨는 일단 죽어야 한다. 껍질이 벗겨지고 죽어야 그 안에 있는 생명이 움터서 땅 위로 솟아나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는 자족하는 마음이 죽어서 생명의 열매를 맺기 원하신다. 그렇게 해야 자신을 의지하는 삶의 방식과 전략을 멈추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신화에 피닉스라는 새가 나온다. 이 새는 끊임없이 날아다닌다. 잠시라도 날갯짓을 멈추면 육지로 떨어져 불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새는 육지에 발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았다. 그런데 불에 타 형체가 사라진 바로 그 순간, 놀랍게도 새로운 재로 탄생하여 날아올랐다. 그렇다. 여기가 바로 주님이 내려오라고 하시는 자리다. 당신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맞이하기 원할 때, 바로 그때가 하나님이 당신을 초청하는 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기 위해 계속해서 발버둥 치며 날개를 퍼덕인다. 우리는 아무리 피곤해도 끊임없이 날고자 한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가 지치고 다쳐서 모든 것을 포기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우리의 모든 자아가 불타버릴 때까지. 사랑의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일하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다. 즉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실망하고 고통을 통과하기까지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다. 그는 생애 초반 40년을 애굽의 궁정에서 보냈다. 그곳에서의 40년은 화려한 세월이었다. 이 기간의 삶을 관리하고 세상을 헤쳐 나가는 기술들을 개발하여 유능한 정치인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나가는 비전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모세를 평안하고 풍족한 바로의 궁궐에서 메마르고 척박한 광야로 내모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보냈다. 광야에서 모세는 과거의 화려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목자의 삶을 살았다. 궁궐의 풍족함을 누리던 삶에서 들판의 궁핍한 삶으로 옮겨졌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자리에서 양들을 돌보는 초라한 목자로 전락했다. 모세에게 광야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새로운 훈련의 장이었다. 이 훈련이 끝날 즈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오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준비를 끝낸 것이다. 하나님이 그 안에서 일하실 수 있는 자리까지 모세를 끌어내리신 것이다.

 

주님이 계속해서 우리로부터 무언가를 빼앗아 가시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이제 또 무엇입니까?' 하면서 의아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이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구나. 하나님은 내 문제에 관심도 없고 나를 도와주시지도 않는구나.' 그러나 이것은 사탄이 주는 거짓말이다. 사실 하나님은 눈동자같이 지키고 계신다. 주무시거나 졸지도 않으시며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상실의 마음과 그에 따른 고통을 경험하도록 허락하신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족하는 것을 멈출 때까지 그렇게 하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행하신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세를 찾아와 지팡이를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 지팡이는 모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전부였다. 그것은 목자로서의 능력과 기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또한 목자로서 타고난 능력도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육체의 능력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자족하고 신뢰하던 그 지팡이를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던 모세에게 이 사실을 깨닫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다. 모세는 이제 자신의 능력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던졌을 때,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을 체험했다. 하나님은 뱀을 다시 잡으라고 하셨고, 모세가 뱀을 잡았을 때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회나 능력을 빼앗아 가신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족하기를 중단하고 하나님께로 나오게 하기 위한 그분의 깊은 사려의 조치이다. 그리고 모든 일이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출애굽기 4장 20절에 보면,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날 이후로 그 지팡이는 더 이상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지팡이가 된 것이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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