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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가 중요시해야 할 신약의 네 단어

새벽지기1 2015. 7. 9. 15:31

 

교회가 중요시해야 할 신약의 네 단어

 

 

 

 

 

 

 


행 4:31-37


교회사를 보면, 초반 몇 세기 동안은 소위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논쟁이 치열하였고, 종교개혁 시기에는 ‘구원론’이, 그리고 한 세기나 밀레니엄(millennium)이 바뀔 때는 ‘종말론’이 각각 논쟁의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신자들의 모임이자,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 관한 논쟁 또한 항상 이러한 논쟁들과 함께 화두가 되어왔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교회의 본질, 사명 그리고 생활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중요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 중 네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케리그마’와 그 단어군

신약에서 이 단어는 복음 선포나 그 내용 곧 메시지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마 12:41, 눅 11:32, 고전 2:4, 고전 1:21, 15:14, 롬 16:25).

흔히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 ‘복음의 종교’ 혹은 ‘계시 종교’라고 말합니다.

말씀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신이 된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첫 구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하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그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곧 예수라 하였습니다.

둘째는 기록된 말씀, 곧 성경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선포되는 말씀, 곧 설교입니다.

복음의 선포는 말로써만 아니라, 본문에서 보듯이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말씀을 전했을 때”, 곧 성령과 능력으로 행해질 때 효력을 나타냅니다.

특히 바울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2. ‘코이노니아’와 그 단어군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함께 공유한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신약에 이 단어는 약 27번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 단어를 ‘사귐’, ‘교제’, ‘쓸 것을 공급함’, ‘서로 나누어 줌’, ‘나누어 가짐’, ‘동정’, ‘연보’, ‘교통’, ‘참여함’, ‘간섭함’, ‘함께 속함’ 등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코이노니아는 모든 것을 나누는 것,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생활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코이노니아(기도와 떡을 떼는 것을 포함하여)로 대별되며(행 2:42),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시간과 물질(롬 12:13; 16:26-27; 히 13:16)도 함께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코이노니아는 이에서 한 차원 더 발전하여 영생을 공유하며 하늘의 은사와 모든 것(빌 2:1; 갈 6:6)을 나누고 복음 사역에도 함께 참여하는(빌 1:5; 4:13; 갈 2:9)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코이노니아는 사람들만의 그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과의 사귐이며 또한 그 자녀와 제자들의 사귐을 말합니다(요일 1:3, 6, 7; 고전 1:9; 고후 13:13).

이로 볼 때, 코이노니아는 교회를 ‘하나님의 권속’(엡 2:19; 갈 6:10) 혹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 은유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즉 그리스도인의 코이노니아는 건물도 아니오 인간의 조직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공동으로 얻은 자녀들이 모든 것을 함께 누리고 함께 일하는 운명공동체인 것입니다.


3. 상호대명사 ‘알렐론’

신약에는 상호대명사 ‘알렐론’(주로 ‘서로’ 또는 ‘피차’로 번역됨)이란 단어가 100번 나온다고 합니다. 주로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에 나옵니다.

신약에 한 종류의 어휘가 100번이나 나오는 경우는 드뭅니다.

신약에 나오는 헬라어 어휘 수는 모두 5,425개인데, 단 한 번만 나오는 단어들이 2000여 개에 이릅니다.

이 중에서 10번 이상 나오는 단어는 1000개가 조금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단어가 신약에서 100번 나온다고 하면 이것은 아주 중요한 단어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상호대명사 ‘알렐론’의 용례를 살펴보면, 이는 주로 명령형과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즉, ‘서로 사랑하라’, ‘피차 안위하라’, ‘서로 지체가 되라’, ‘서로 위하라’, ‘서로 존경하라’, ‘서로 판단하지 말라’, ‘서로 격동하지 말라’, ‘서로 받아라’, ‘서로 권하라’, ‘서로 문안하라’, ‘부부간에 서로 분방하지 말라’, ‘서로 기다리라’, ‘서로 종노릇하라’, ‘서로 짐을 지라’, ‘서로 용서하라’, ‘서로 인자하게 하라’, ‘피차 복종하라’, ‘서로 남을 더 높이라’,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서로 용납하라’, ‘서로 권면하라’, ‘서로 선을 좇으라’, ‘서로 돌아보라’, ‘선행을 서로 격려하라’, ‘피차 원망하지 말라’, ‘서로 죄를 고하라’, ‘서로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 ‘서로 대접하라’, ‘서로 겸손하라’, ‘서로 사귀라’ 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서로 권한다’는 말은 목회자가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말보다 더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그냥 점잖게 가르치는 수준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 있으면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럴 수 있는가?’ 하고 책망한다는 의미가 있는 어휘입니다.

따라서 이는 교육자와 피교육자를 엄격히 구별하고, 강대상과 회중석을 따로 분리해야 한다는 우리의 고전관념에 대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느덧 목사에게 월급 주고 ‘당신이 다 하시오.

우리는 구경꾼이나 되겠습니다’ 하는 식이 되었습니다.

회중은 관객의 입장에서 앞에서 설교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목회자는 원맨쇼를 해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일방적이고 한 방향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이며 서로를 향하여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생각할 때 이 상호대명사 ‘알렐론’ 즉 ‘서로’ 혹은 ‘피차’라는 의식이 떠올라야 합니다.


4. ‘디아코니아’와 그 단어군

교회생활을 묘사하기 위하여 신약에 등장하는 세 번째의 어휘는 ‘섬기는 일’, ‘직분’, 혹은 ‘봉사’라는 뜻의 명사 ‘디아코니아’와 그 단어군입니다.

‘디아코네오’는 동사로써 ‘섬기다’, ‘봉사하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종이 주인집의 식탁에서 주인과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차리고 섬기는 일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 즉 ‘섬기는 사람’, ‘집사’, 또는 ‘사역자’ 등을 나타낼 때에는 ‘디아코노스’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군도 모두 합하여 신약에 100번 정도 나온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3:5에서 자신과 아볼로를 ‘디아코노스’(일꾼, 집사)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행 6:1에서 헬라파 과부들이 제외되었다고 불평한 ‘구제’라는 말이 ‘디아코니아’인데, 이 단어는 이어서 사도들이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정확하게는 ‘말씀의 봉사’로 여기서도 ‘디아코니아’라는 단어가 사용됨)을 전무하리라”(행 6:4)고 말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을 공급해 주는 것이나 말씀을 공급해 주는 것에 똑같은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은사 혹은 봉사에 있어서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자의 직무나 물질을 맡아 회계 집사로 사역하는 것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질적으로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 ‘디아코니아’ 단어군은 ‘청지기’ 혹은 ‘청지기의 일’을 의미하는 ‘오이코노모스’, ‘오이코노미아’ 단어군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처럼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입어 하나님의 거대한 가족을 이루는 하나님의 경륜(엡 1:9; 3:2, 9) 혹은 그 직임(고전 9:17; 골 1:25)을 의미할 때 ‘오이코노미아’가 사용되었고, 그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집의 일꾼들을 청지기(‘오이코노모스’)라 하였는데(고전 4:1-2; 딛 1:7),

이 청지기가 바로 하나님의 권속들에게 각양 은사를 받은 대로 먹을 것을 공급하는 교회의 일꾼들인 것입니다(벧전 4:10; 비교. 마24:45).

예수님께서 “내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오히려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45)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의 은사를 따라서 묵묵히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진정한 지도력은 섬기는 데서 나옵니다.

또한 이 지도력은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어서는 안되며, 성경의 가르침과 원리를 따라 위임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케리그마인 말씀을 중심으로 성도들이 서로 만나 교제를 이룰 때에 그곳에 교회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거기서 크리스천들이 은혜를 받고 힘을 얻은 후에 세상으로 나갑니다.

섬기는 자로서 디아코니아를 실천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말씀의 홍수를 이루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그리스도를 전하는 케리그마가 부족하고, 이로 인해 성도들 서로간의 사귐도 약하고, 특히 세상에 나가 섬기는 실천의 삶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풍성한 기업을 공유한 사람들답게, 받은 은사를 서로를 향하여 섬기는데 사용하며, 세상을 향해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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