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명혁칼럼 160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8)

라이프찌히 논쟁(1519년) 이후 루터는 일약 국가적 영웅으로 그리고 국제적 인물로 등장했다. 루터의 저서들이 프랑스, 스페인, 영국, 스위스 그리고 로마에까지 배포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당시의 인문주의(Humanism)와 국가주의(Nationalism)와 합세해 크게 확장되었다. 종교개혁과 인문주의는 그 이념과 방법에 있어서 공통점이 많았고 상호 격려의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근본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종교개혁의 이념이 인문주의나 국가주의의 이념과는 달랐다. 후텐과 지킨겐은 억압받는 독일 민중 편에 서서 민중운동을 펴나가면서 루터에게 무력적 협조를 제공하며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와 같은 제안에 대해 “나는 그들을 멸시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사용하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개..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7)

“라이프찌히 논쟁” 루터와 로마교회 사이에 벌어진 가장 큰 논쟁이 1519년 7월 4~14일까지 라이프찌히(Leipzig)에서 행해진 라이프찌히 논쟁이었다. 로마교회측에서는 잉골슈타트(Ingolstadt)대학의 교수 존 에크(John Eck)를 비롯하여 잉골슈타트 대학과 라이프찌히 대학의 교수들이 참석했고, 루터측에서는 루터를 비롯하여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 칼슈타트(Carlstadt)와 멜랑톤(Melanchthon) 등이 참석했다. 에크가 먼저 도착하여 라이프찌히 시의회가 제공한 76명 호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시가를 왕래했다. 비텐베르그 일행은 며칠 뒤 도끼로 무장한 200명의 학생들과 함께 도착했다. 토론이 라이프찌히 성의 강당에서 벌어졌다. 첫날 모든 사람은 성 토마스 교회의 여섯 시 미사에 참석했..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6)

카제탄과의 두번째 논담에서 루터는 보다 담대했다. 이번에는 교황의 권위와 아울러 교서의 권위를 부인했다. 성경의 권위와 이성으로 무장된 신자는 교황보다 우월하다고 했다. 카제탄과의 두번째 논담 이에 대해 추기경 카제탄은 성경은 해석되어야 하는데 교황이 성경의 해석자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황은 종교 회의보다도 성경보다도 그리고 교회 안의 무엇보다도 우월하다고 했다. 루터는 “교황이 성경을 우롱하고 있다. 나는 교황이 성경보다 우월함을 부인한다”라고 응수했다. 케제탄 추기경은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이 호통을 쳤다. “루터가 ‘철회한다’고 말하지 않는 한 여기를 떠나서 결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때 루터는 고향에 편지하기를 카제탄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 마치 당나귀가 하프를 ..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5)

루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1517년 만성절(All Saints) 전날 밤인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그의 성곽교회(Castle Church)의 문에 95개 조항(The Ninety-Five Theses)을 게시하고 이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를 원했다. 교황청의 반응 루터가 95개 조항을 성곽교회 정문에 게시했을 때 그것을 널리 퍼뜨려 대중을 선동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다만 그 책임자에게 도전하여 그 설명을 들으며 학자들 사이에서 토론을 하려는 것이었다. 루터는 95개 조항의 한 사본을 마인츠의 알버트 감독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은 글을 첨부했다. “땅의 찌끼와 같은 제가 존귀하신 당신께 접근함을 용서하소서. 거룩하신 당신께서 먼지와 같은 이 글을 살피시고 나의 탄원을 들으소서. 당신께서 나의 ..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4)

루터는 자기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탑 속의 체험’을 한 후 이제는 선행도 고행도 성자 숭배도 종교 의식도 아닌 성경과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기독교의 핵심으로 삼게 되었다. “개혁의 봉화” 루터가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루터가 그 당시 중세 교회의 사치와 탐욕과 무지를 통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복음 진리를 체험한 후에도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수도원과 대학과 교구에서 연구, 저술, 교수 및 설교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1517년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들어야 할 기회가 왔다. 자기 교구의 양떼들이 면죄부를 얻기 위해 성 밖으로 몰래 빠져 나가는 것을 목격했을 때 루터는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3)

“어째서?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버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나 자신이 버림을 당하는 것은 얼마든지 타당한 일이다. 나는 약하고 불순하고 불경건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약하지도 불순하지도 불경건하지도 않으신데…. 어째서? 어째서?” 다음 순간 루터는 벼락에 맞은 듯한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버림당한 그리스도를 만난 루터” 로마에서 돌아온 루터는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새로운 참회의 방법으로 영혼의 평안을 얻어 보려고 힘썼다. 한번 죄에 대해 고해(penance)를 시작하면 때로는 6시간 동안 계속하기도 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서도 그는 깊은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수도원장 슈타우피츠는 화를 내곤 했다. “마르틴, 하나님은 그대에게 화를 ..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2)

“로마여 안녕!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모두 로마를 떠날지어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루터는 로마를 향해 서글픈 이별을 고했다. “수도사가 된 루터”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약한 청년 루터는 두 주 후인 1505년 7월 17일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수도사의 소명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천국에 이르는 지름길이 수도사가 되는 길이라는 중세 교회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원장 앞에서 엄격한 수도원 생활의 규칙을 따를 것을 서약했다. 즉 자신의 의지를 죽이고, 소량의 음식을 먹고, 남루한 옷을 입으며, 밤에는 기도하고, 낮에는 일..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1)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성취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복음의 진리를 마르틴 루터는 깨닫게 되었다.” “개혁 전야의 독일” 종교개혁 전야의 독일은 매우 종교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3만명이 거주하는 콜론(Cologne)이란 도시 안에 1백여개 이상의 교회와 기도 처소가 있었고 1백여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감동을 주는 종교의식이 곳곳에 성행했고 모든 주위가 온통 종교적인 것으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그 당시 베스트셀러의 하나는 「옳게 죽는 방법」(The Art of Dying) 이라는 종교 서적이었고, 성자와 성물의 숭배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성자의 이름을 따라 아이들의 이름이 지어졌고 신도들은 ..

“종교개혁의 배경과 준비”(2)

종교개혁’(Reformation)은 교회 역사의 발전 과정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종교개혁은 지난날 역사 발전 과정에서 빚어진 잘못과 오류들을 시정하고 개혁하여 본래적 기독교의 모습을 되찾자는 ‘회복 운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종교개혁을 가져올 수밖에 없게 했던 역사적 요인들로는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 ‘국가주의’와 ‘인문주의’의 흥기, ‘스콜라 신학의 붕괴’, 중세기 말의 ‘신비주의’ 및 ‘종교적 경건’을 들 수 있다. 지난번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에 이어 여기서는 ‘국가주의’와 인문주의’의 흥기를 살펴본다. “국가주의(Nationalism)”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스페인, 영국, 프랑스는 국가로서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다. 이들 국가가 점차 정치적 독립을 이룩하게 되자 중..

종교개혁의 배경과 준비(1)

‘종교개혁’(Reformation)은 교회 역사의 발전 과정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종교개혁은 지난 날 역사 발전 과정에서 빚어진 잘못과 오류들을 시정하고 개혁하여 본래적 기독교의 모습을 되찾자는 ‘회복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이념은 분명히 중세 기독교의 붕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중세 기독교의 ‘정화’와 기독교 이념의 ‘부흥’과 ‘회복’에 그 궁극적 목적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베인톤 교수는 종교개혁이 중세의 교회 구조와 사회 체제를 산산이 부서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은 ‘종교의 부흥’(revival of religion)을 가져왔고 ‘기독교의 갱신’(renewal of Christendom)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물론 종교개혁을 부르짖다가 도에 지나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