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어서 마가는 예수님과 그 일행이 벳새다에 있을 때의 일을 전한다(22절).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예수께서 자주 방문하셨던 곳이다. 그 동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데려와 고쳐 주시기를 청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손을 잡고 마을 바깥으로 나가신다(23절).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실 때에도 그렇게 하셨다(7:33). 예수님은 치유 이적을 통해서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거나 인기를 끌려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의 두 눈에 침을 뱉고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24절)고 물으신다. “손을 얹다”라는 말은 기도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자 그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라고 답한다.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실 때는 결과가 즉각적으로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부분 치유가 일어났다. 예수님은 그의 눈에 다시 손을 얹고 기도하신다(25절). 그러자 그 사람이 온전히 보기 위해 노력한다(“뚫어지듯 바라보더니”). 그러자 시력을 온전히 회복한다. 예수님은 그에게, 동네 사람들에게 치유 사실을 퍼뜨리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이르신다(26절).
묵상:
예수님은 멀리서 말씀 한 마디로도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벳새다의 시각장애인에게는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분의 이적의 능력이 약해진 것일까요? 아니면 그의 시력 상실증이 그만큼 심했기 때문일까요? 그게 아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의도하셨을 것입니다. 온전한 시력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하지만 본인 자신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깨우쳐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보고 들은 것을 통해 “나무들이 걸어다니는 것 같은” 정도의 영적 시력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온전한 시력을 얻기 위해 “뚤어지듯이 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말씀과 이적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닫혀진 마음의 자물쇠를 여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눈먼 사람이 희미하게나마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처럼 눈과 귀가 열려, 불완전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면 금새 눈이 닫히고 귀가 막힙니다. 눈먼 사람이 뚫어지게 응시하여 시력을 되찾은 것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하나님 나라를 더 분명히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예수께서 열어 놓으신 하나님 나라의 문을 들어가 그 나라를 더 깊이 알아보고 체험하는 과정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은 눈 질끈 감고 믿지 않으려는 불신앙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문을 따 놓으셨음에도 그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어미 닭이 품고 있던 계란 껍질을 깨뜨려 놓았으면, 안에 있는 병아리는 몸을 움직여 기지개를 펴고 나와야 합니다. 어미 닭이 계란을 깨뜨려 놓았는데, 속에 있는 병아리가 그 안에 웅크리고 앉아 머물러 있으려 하면 새 세상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믿음은 예수께서 깨뜨려 놓으신 무지와 어둠의 껍질을 벗어나 기지개를 펴고 새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저희의 귀를 열어 주시어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더 선명히 듣기 원합니다. 더 깊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저희의 영적 청력이 더 예민하게 해주십시오. 저희의 눈을 뜨게 해주시어 주님의 손길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더 분명히 보기 원합니다. 더 많이, 더 깊이 기도하여 저희의 영적 시력이 더 밝아지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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