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

한국교회의 50년 후를 위하여 기도한다./ 신동식목사

새벽지기1 2024. 11. 1. 05:37

한국교회의 50년 후를 위하여 기도한다.

30년 전부터 교회에 문화와 기독교 세계관 강의를 하면서 강조하였던 내용이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현재 많은 생각이 든다. 앞으로 50년을 더 준비해야 하는 현실을 목도한다. 그 시절 강조점이다

첫째, 한국교회는 김용욱을 조심해야 한다. 김용욱이 한국사회의 기성세대의 세계관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무너뜨리고 성경관을 파괴시키고 그리고 역사적 비평을 통하여서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하는 그러한 세계관을 주입시킬 것이다. 이것이 기성세대들에게 확산되어지게 되면 그 자녀들에게 큰 피해를 준다. 그래서 김용옥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김용옥과 맞먹을 수 있는 기독교 사상가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90년대 시작된 반문화운동가들 혹은 문화 막시즘 운동가를 조심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80년대 군부 독재가 끝나고 난 뒤에 민주화 운동을 하였던 일단의 문화 세력들은 이제 공론의 장에서 자신들의 역할은 일단락 됐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국민들의 세계관을 온전히 바꾸는 일에 전력해야 된다고 결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문화를 통하여서 국민들의 세계관을 이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때 중요한 인물들로 본다면 서태지와 아이들 ,영화로 본다면 박철수, 강제규와 같은 그런 인물들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상업영화를 통하여서 세계관의 변혁을 추구했던 그런 사람들이다.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 영화가 서구에서 큰 상을 받은 것은 시대의 세계관을 잘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미디어 세대의 출현을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중립적이지 않다. 영화를 보는 사람의 세계관을 움직인다. 그래서 영화를 잘 분별할 수 있어야 된다고 많이 강조하였다.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세계관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함을 수도없이 강조하였다.

세 번째, 포스트 모더니즘과 함께 시작된 현대주의와 성정체성에 대하여 분별을 강조하였다. 90년대는 젠더가 보편적 용어가 아니고 사회적 성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때 이런 말을 하였을 때 다들 무슨 뚱딴치 같은 소리냐냐고 하였지만, 이미 서구에서 시작된 이런 사상들이 한국에 조금 조금씩 수입되고 있었고, 그게 90년대로부터 씨앗이 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네 번째, 주일학교 중고등부 아이들을 위하여 주일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걸 가르쳐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유는 율법주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은 기독교의 유일한 독특성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다른 차이점은 바로 주일이다. 성경의 명령이고 그리스도인 정체성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교회는 힘이 약해질것이라 강조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대학입학을 위하여서 고 3만 되면 그냥 1년 동안 교회 안 나와도 아무 말하지 않는 그런 시대였다. 그렇게 20년 정도 이어졌다. 이제 더 이상 지금은 주일날 학원 가고, 주일날 시험 보는 것에 대하여 교회가 어떤 말도 하지 못한다. 막을 수 있는 힘도 능력도 사라졌고, 시험 보는 아이들도 미안함도 없다. 주일은 예배하고 경배하는 날로서의 기능이 반감되었다. 그렇게 하는 순간 그렇게 자라난 20대-40대는 전혀 다른 세대가 됐고 이 시대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데 스폰지와 같이 돼버린 것이다.

다섯 번째, 시대를 변혁하는 교회로 세워지기 위해서 목사들은 연속강해설교를 하고, 세계관 교육을 반복하여 계속해서 가르쳐야 됨을 강조하였다. 거기에 교리교육과 함께 반복하여 계속해서 가르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마침내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고, 위기가 왔을 때 그 위기를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것이다.
계속해서 한국교회는 오직 성장을 위해서 설교하였고 성장을 위하여 기복주의가 온 교회에 다 가득 찼다. 거기에 아이들은 화요 찬양 집회, 목요 찬양 집회니 하면서 생각하는 신앙보다는 감정의 신앙으로 계속해서 자라났다. 가슴만 뜨거운 신앙인으로 자랐다. 그래서 뜨거운 찬양을 하고 집에 가면서 다 버려 버린다. 그 찬양은 자기의 스트레스 해소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든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다든지 하는 일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균형있게 가르쳐야 했는데 편중되었다.
그 열매가 지금의 모습이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어. 찬양집회도 있었고 모임이 있었지만 지금 그들이 40대가 됐을 때 교회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신앙인을 만들었고 오로지 이기주의 종교인만 만들었다가 자신들의 필요가 채워지자 더 이상 교회에 나오지 않음을 의미한다.

끝으로는 교회가 도덕적으로 정직해야 된다. 정직한 질문을 정직한 답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어떤 질문을 받을 준비를 해야한다. 그런데 불구하고 젊은 세대들이 재정에 대하여서 그리고 인사에 대하여서 그리고 설교에 대하여서 질문할 때 답이 아니라 질문을 막아 버린다면 이는 교회를 허무는 행위다. 이렇게 지내온 시간에 많은 청년들은 다. 입을 막고 생각하지 않는 신앙으로 자란것이다.

그리고 이제 교회는 거대한 물결 즉 이미 서서히 젖어들고 있는 대중문화의 물결에 무너졌다. 대중문화를 조심해야 된다고 대중문화를 잘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된다고 이야기 할 때 오히려 조롱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런 비판을 했던 사람들이 교회 성장을 위하여 교회 안의 온갖 대중문화적 요소를 다 수입을 해서 사용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 교회가 세속화의 위기에 있다고 한다. 더이상 물들지 않고 편안한 목회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는데 이길 수 없다.

한국교회는 쇠하는 길에 가까이 가고 있다. 30년 전에 이렇게 가면 망한다고 밀했는데 지금 그 말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것은 내가 쓴 책에 이미 기록해놓았다. 지금 하는 말이 아니고 내가 쓴 책에 이미 20년 전에 쓴 책에 이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그런데 지금 그 책이 너무 속상하다. 그 책이 맞지 않아야 되는데 맞는 것 같아서 속상하다.

한국교회를 다시 살리는 길은 싸움을 통해서 이길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제는 다시금 교회를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정말 지난 120년 동안 교회를 세우는 일에 힘썼듯이 앞으로 한국교회는 주변부로부터 저 밑바닥으로부터 다시금 세워야 한다.
다시금 차근차근 세워서 앞으로의 최소한 50년 뒤 백 년 뒤를 바라보면서 다시 시작해야 된다. 지금 총체적으로 싸울 수 있는 어떤 기반이 없다. 있는건 힘과 돈과 권력과 그 다음에 어거지만 남아 있다. 어디에도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지금 교회 안에 없다. 교양의 젊은이들이 이 시대의 질문에 대하여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긴 시간 진지하게 기다리면서 인내하면서 가르쳐줘야 한다.

현재 젊은이들이 부모가 교회에 있으니까 나오는 것이다. 이제 자신들이 자립하고, 분가를 한다든지 자신들의 가정을 꾸린다든지. 그러면 긴 시간 동안 신앙은 버릴 것이다. 신앙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냥 정녕 숭배하듯이 신앙생활할 것이다. 때로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이다. 관계를 맺지 않고 그냥 홀로 살 것이다. 그리고 50대 이후는 앞으로 계속해서 도피 성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당장은 지금 30 , 40대가 아니라 이들이 살아야 할 50대의 한국교회다. 앞으로 10년 후의 니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서글프고 슬프지만 그 현실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특별히 고난과 핍박을 감사함으로 받으며 교회 순결성을 다시 회복하는 일을 시작해야 된다. 이것이 다시 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