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주년 교회개혁 기념주일과 한국교회의 변곡점
지난 20년 동안 교회를 세우면서 종교개혁 (교회개혁)기념 주일은 지켰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교회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종교개혁은 비 성경과 사제주의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싸움은 사제주의였습니다. 사제주의는 성경 독점권을 가지고 구원을 난발하였습니다. 사람은 사제와 평신도로 구분하였습니다. 사제만이 성경을 읽고, 사죄의 권한이 있으며 구원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 무서운 죄악에 누구도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평신도는 듣기만 하는 존재입니다. 감히 성경을 읽고 질문하거나 가르칠 수 없습니다. 영적 노예자가 바로 평신도입니다. 평신도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평신도를 깨우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평신도를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만인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이 일을 하였습니다. 평신도를 없앴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슬프게도 평신도를 깨웠습니다. 죽은 평신도를 깨우고 제사장직을 무덤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교회에서 로마 교회와 같은 사제직이 깨어났습니다.
평신도는 깨어나도 여전히 평신도입니다. 평신도가 되었기에 감히 목사의 결정에 반대할 수 없습니다. 당회는 교회의 성도의 독립과 민주적 절차를 돕기 위하여 존재하는데 당회가 하나의 사제와 같은 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평신도는 당회의 결정에 반기를 들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습니다. 정직한 질문과 정직한 답이 불가능합니다.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는지 토의가 없고 유교적 장유유서만 존재합니다.
종교개혁은 평신도직을 죽이고 제사장으로서의 성도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래서 직분자가 아니라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직분은 목사와 함께 서로를 섬기고 교회를 세워가는 동역자의 상징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이교신앙입니다. 로마 교회를 비롯한 이교주의는 사제주의입니다. 사제의 말이 곧 법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양심의 자유를 회복시켰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결정해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양심이 움직이지 않으면 따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위대한 것은 사제로부터 양심의 자유를 쟁취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칼빈주의가 가는 곳마다 독재자들이 싫어했다고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이 평신도와 사제를 관속에 집어 넣고 만인 제사장으로의 제사장을 부활시켰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은사와 소명에 따라 직분을 주셨습니다. 모두가 성도이자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되지 않고서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가 되고 직분자가 됩니다. 그래서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을 갖습니다. 그렇게 교회로서 세상에 살다가 주일에 교회로 모입니다. 교회로 모임이 없이는 세상에 나가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활의 날을 구약의 연속선 상에서 예배의 날로 주셨습니다.
종교개혁이 준 선물은 거룩한 주일의 회복이었습니다. 주일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무너집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사람을 의지할 때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도록 심판 하였습니다. 안식일이 없는 이스라엘은 존재가치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거룩한 주일을 회복하고 예배의 날로 지냈습니다. 특별히 칼빈주의로 대변되는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십계명 해설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가르쳤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주일에 읽어졌습니다. 그 만큼 주일이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성경을 성도들의 품으로 돌려주었습니다. 사제의 손에서 그리고 라틴어에 갇혀있었던 성경을 자국어로 돌려주었습니다. 이 일에 앞선 선구자는 10-12세기의 왈도와 위클리프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상을 왈도파와 롤라드파 사람들이 전하였습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읽자, 사제들의 불의함이 나타났습니다. 사제들이 성경을 독점하자 온갖 부패함이 나타났습니다. 사제주의의 부패함은 성적 타락과 돈의 욕망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세 로마 교회의 흑역사입니다. 성경을 자국어로 읽은 성도들은 사제들의 거짓과 부패함과 욕망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저항은 사제들이었습니다.
사제들은 성도들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였고 오직 자신들만이 7가지 예식을 통하여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로 말하자면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집요하게 시도하였습니다. 개혁자 루터는 이 악한 일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각자의 자신의 나라말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은 동역자(성도)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고 양심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완벽하게 완성한 이가 칼빈입니다.
칼빈의 정신을 따라 영국의 청교도들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설교하면 감옥에 잡혀가고 죽음이 오는 법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설교자는 설교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주일에 교회에서 설교 할 수 없게 집에 강금시켰을 때 이들은 창문을 열고 집에서 큰 소리를 설교하여서 성도들이 듣게 하였습니다. 그것도 못하게 감옥에 가두면 글로써 설교하였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이러한 열매입니다.
성경을 회복하고 온 성도(동역자)가 성경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강해설교하고 토론할 수 있게 한 것이 개혁가들의 선물이었습니다. 이제 베뢰아 교회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말씀 선포에 그런가하여 상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가는데 까지 가고, 멈추는데 멈추는 계시의존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종교개혁의 가장 열렬한 나라인 스코틀랜드는 오늘날 장로교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스코틀랜드에 가서 장로교가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은 유한한 17세기 개혁교회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처음 작성한 1560년 신앙고백서의 정신을 웨스터민스터가 잘 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총회의 결정입니다. 그러나 총회는 교회의 모임이지만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총회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총회는 이단 박멸과 다음 시대의 신앙고백 그리고 교회의 정치와 질서 문제만 다르게 하였습니다. 정말 중요한 원리입니다(스콭랜드 신앙고백서 20장). 이것은 로마 교회의 교황들이 범하였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총회가 성도(동역자)의 양심을 지배하지 않으려는 선배들의 고심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31장 4조)과 대 소요리 문답에 더욱 강렬하게 전수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교회가 유지되고 전수되는 원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받는 일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복음과 함께 고난받는 교회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경이 양심의 푯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성경을 가장 잘 요약한 신앙고백서를 바르게 알고 따르는 일이 중요합니다. 성도는 성경과 신앙고백서를 항상 읽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1907년에 부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흥의 열기가 1910년이 되면 차가워집니다. 이때 총회는 백만인 전도운동(1909년)을 계획하고 실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부흥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흥의 열기가 식었습니다. 그리고 부흥을 경험한 세대가 얼마가지 않아서 신사참배에 동참하였습니다. 총회가 결의하였습니다. 총회 결의에 반대한 목사들은 감옥에 가고 제명당했습니다. 이때 탈옥한 성도가 세운 교단이 고신입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20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총회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선포된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비판없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크고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명백한 살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갈2:11-14)" 이것은 종교개혁 교회는 사제주의 교회가 아니라 만인제사장 교회라는 선언입니다.
종교개혁은 우리에게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사제에 의한 신앙이 아니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직접적 신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제주의로 돌아가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반납하면 안 됩니다. 성도는 성경과 교리에 따라 더욱 명철하게 분별하고 성경이 말하는 것으로 확인된다면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평신도라는 말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말은 힘이 있습니다. 단어를 쓰면 예속당합니다. 우리는 평신도가 아니라 주체적인 성도이자 동역자입니다. 선교의 영역도 동일합니다. 평신도 선교사라는 말은 없습니다. 굳이 구분한다면 전문인 선교사와 목사 선교사일 뿐입니다. 말이 자연스럽지 않더라도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만인제사장으로서 동역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507주년 종교개혁 기념 주일은 한국교회에 중요한 날입니다. 한국 교회사의 변곡점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더욱 기도하게 됩니다. 변방으로 떨어질 교회를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하나님의 섭리로 봅니다. 위그노 교회가 무력저항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으려고 하다가 102년동안 광야시대를 살게됩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광야시대가 시작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더욱 곤고한 관용을 강요할 것입니다.
성도(동역자)들은 이 날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살펴보고 성경과 교리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주님 오심을 맞이할 수 있는 교회로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관용의 시대에 교회의 거룩함이 소망임을 보여주는 준비를 해야합니다. 변방에서 중심을 깨우는 일을 더욱 확고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죽은 날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날입니다. 개혁은 항상 개혁되기 때문입니다. 개혁 즉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은 항상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이 그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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