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우상의 도시에 복음을 심다.(행 17:16~34) / 이재훈목사

새벽지기1 2024. 8. 26. 05:46
<사도행전>에 나타난 복음 전파의 패턴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어떤 상황이 발생하고, 불신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의문에 대하여 사도들이 답변하는 형식입니다. 새로운 상황에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복음 전파를 우리가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앞서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어떤 일, 역사, 상황에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된 상황이라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를 거쳐 아테네로 들어갑니다. 복음이 아테네에 왔다는 것은 이교 문화의 심장부를 관통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테네는 그리스 헬라 문명의 발상지로서 철학, 문학, 예술 등 모든 분야의 중심이었습니다. 먼저 아테네에 들어간 바울이 도시를 둘러보는데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아테네의 웅장함이 감동이 아니라 탄식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인간 최고의 문학, 철학, 예술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도시였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만든 수많은 우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고 슬퍼한 것입니다. 
바울이 아테네 회당에서도 복음을 전했지만, 더 많은 전도는 시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시장이라는 단어는 ‘아고라’입니다. 아고라는 아테네 사람들의 삶의 중심을 이루었던 장소입니다. 이 아고라에서 바울이 철학자들과 토론합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했습니다. 철학자들이 바울을 폄하하면서도 처음 들어보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의 신선함에 관심을 가졌고, ‘아레오바고’라는 광장으로 데려갑니다. 아레오바고는 로마 통치 아래에서 아테네가 자치 정부 역할을 하는 공식적인 의결 기구였습니다. 재판장 역할도 하고, 새로운 사상을 심의하는 기구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광장 사역
“그때 그들은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려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소개하고 있는 이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우리 귀에 생소한 것들을 전하니 우리가 그 뜻을 좀 알고 싶습니다’”(19~20절). 
바울이 전한 새로운 가르침, 복음의 소식에 새로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더 들어보자고 했습니다. 새로운 가르침을 듣고 싶어 하는 이들에 의한 초청입니다. 34절을 보면 바울의 설교를 듣고 믿게 된 아레오바고 관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매우 긍정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나 매우 소수였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전한 설교는 가장 탁월한 교차 문화적인 복음 전도의 모범입니다. 우상과 인간의 철학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우상의 도시 한복판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단 한 사람의 결신자만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것이고, 그 사람을 통해 복음 전파가 시작됩니다. 복음 증거는 언제나 한 영혼을 놓고 하는 것입니다. 한 명의 회심자만 있어도 매우 값진 것입니다. 누군가 복음을 심고, 누군가 추수하는 일들이 늘 있기 마련입니다. 복음 전파는 늘 한 번에 수만 명이 뒤집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역사가 있다면 그 전에 수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또 기도했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광장 사역이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의 상황에 맞는 패러다임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상이 가득한 도시를 보면서 분노했습니다. 바울이 분노를 쏟아내면서 아테네 도시를 다녔다면 그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바울은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지만 그것을 사람들에게 지혜롭게 전하는 방식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의 탁월함은 청중들과의 접촉점에서 나타납니다.  
청중들과의 두 가지 접촉점
“그러자 바울이 아레오바고 광장 가운데 서서 말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내가 보니 여러분은 여러모로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내가 두루 다니면서 여러분이 무엇을 섬기는지 자세히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게 됐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예배해 온 그 신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합니다’”(22~23절). 
첫째,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이여! 내가 보니 여러분은 여러모로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인정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경계심을 풀고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긍정적인 언어로 바꿈으로써 그들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문을 연 것입니다. 같은 말도 긍정적인 관계에서 그 사람이 복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을 여는 것이 지혜입니다. 
둘째, 바울이 아테네에 즐비한 제단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접촉점으로 삼았습니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그 신을 내가 안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알려주겠다”고 대화를 풀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본론을 말했습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 신은 온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사람이 손으로 지은 신전들 안에 살지 않으십니다”(24절). 
바울이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은 당시 에피쿠로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에 사람이 손으로 만든 신전에 살지 않으신다”는 말은 우상 도시 한복판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은 인간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신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뭔가 부족해서 인간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다른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25절).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섬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섬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은 인간이 찾아 만날 수 있고, 인간과 함께 임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민족을 만들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셨고 각 나라의 연대를 미리 정하시고 그들의 국경도 정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과 그리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우리가 그분의 자녀입니다’”(26~28절). 
인간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임재하시는 분입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설명할 때 구약을 인용하지 않습니다. 아테네 철학자들이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읽어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그리스 사람들에게 유명한 시구들을 인용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이교도의 시를 구약과 동일한 권위로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 이방 철학과 우상에 가득한 사람들을 전도할 때 이런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 있는 사람에게는 율법 있는 자처럼, 율법이 없는 사람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철학이 잘 나타나는 설교입니다. 
세 가지 결론과 결단 촉구
 
바울이 하나님을 증거한 이후에 세 가지 결론을 내며 결단을 촉구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명령하십니다. “알지 못했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셨지만 이제는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30절).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데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둘째, 왜 회개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운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할 날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날에 대한 증거를 보이셨습니다”(31절). 사람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심판입니다. 세상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종말도 끝이 아니라 심판일 뿐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 남아있기에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신다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마땅히 심판받아 죽어야 할 우리가 회개하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증거했습니다. 
사람들이 세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일부는 비웃었고, 일부는 더 알고 싶었고, 일부는 믿었습니다. 오늘날 복음에 반응하는 세 부류가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이 시대에도 아테네와 같은 많은 우상과 신전이 존재합니다. 보이는 신전과 신상은 일부만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교묘한 형태의 우상과 신전이 존재합니다. 바울이 아테네 언덕에서 바라본 그 도시의 우상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존재합니다. 돈의 우상, 술과 마약의 우상, 성욕과 부도덕의 우상, 정치 권력의 우상, 힘과 건강의 우상 등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바울이 아테네를 바라보며 품었던 거룩한 분노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지혜로운 변론으로 바꿔 증거했던 그 열정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절대 포기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진리를 그 청중들의 문화를 통해서 지혜롭게 전하는 노력과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타 종교인들, 우상숭배 하는 사람들,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행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