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길을 내시는 하나님 (행 15:36~16:10) / 이재훈목사

새벽지기1 2024. 8. 16. 04:51
우리는 손에 잡히는 것 같이 바로 느끼고 볼 수 있어야만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은 다릅니다. 우리가 때로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특히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회의를 가짐으로써 이방인들에게 율법에 짐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결정을 통해서 이제 복음을 더 확신 있게, 더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이방인들을 전도하는 일을 방해하는 율법적인 그리스도인들의 편협을 막아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두 번째 선교 여행을 계획을 합니다. 첫 번째 전도여행과 다른 상황에서 두 번째 선교여행이 시작됩니다. 첫 번째 선교 여행은 안디옥 교회가 마음을 같이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선교여행은 바울과 바나바 간에 의견 차이로 인해서 두 팀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 요인은 첫 번째 선교여행에서 마가 요한이라는 제자가 함께 여행을 하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단지 조카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지만, 바나바는 “마가도 함께 데리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바울은 “데리고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의견 차이가 심하게 났고, 서로 대립하며 다른 팀으로 나누기로 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가고,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새로운 팀원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와 함께 새로운 팀을 꾸려서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 과정을 보면 바나바가 얼마나 훌륭한 인격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역시 그는 관계중심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마가가 1차 선교여행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갔지만, 다시 한번 그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사람이 다시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점에서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보면 바울이 마가를 자신에게 데리고 오라고 디모데에게 말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훗날 바울이 뉘우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마가를 품지 못했던 것, 바나바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을 디모데에게 합니다. 그때 마가를 제외시켰던 것을 후회하고 뉘우치면서 자신의 마지막 여정에서 마가를 다시 만나기 원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때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길을 내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두 팀으로 나뉘어 선교여행을 가게 되면서 더 많은 영역에 복음을 전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분열은 아픈 일이고 상처지만, 때로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새로운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할례는 구원의 본질 아닌 방법론
<사도행전>의 역사는 물론이고, 그들이 나뉜 이후 바울을 중심으로 사역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사역을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누가가 바울팀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경험한 것만 기록한 것입니다. 바나바팀에 있었던 일을 자신이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바울과 실라, 누가가 루스드라에 도착했을 때 거기서 디모데라는 팀원을 합류시킵니다. 루스드라는 1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뻔 한 위기에 처했던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던 도시였을지라도 또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 집념과 끈질김, 포기하지 않고,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그리스인입니다. 그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디모데를 자신의 팀에 합류시킬 때 유대인들이 받는 할례를 받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데리고 가기 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에 그를 데려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 사는 유대 사람들 때문에 그에게 할례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행 16:3). 
의문이 생겨야 합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의결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에게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는 것처럼,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바울과 바나바가 주도해서 결의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떠나면서 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많은 유대인을 만나게 될 텐데,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마음을 열고 만나주지도 않고, 디모데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을 생각해서 할례를 받도록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디모데를 공격함으로 인해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차원, 그들과 교제하기 위한 아이디어 차원에서 할례를 받도록 한 것입니다. 
정반대로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바울의 동역자 가운데 디도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디도 역시 헬라인 출신입니다. 그런데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도록 막습니다. 디도에게는 왜 할례를 받지 않도록 했을까요? 당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디도에게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면서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할례를 받지 않도록 막은 것입니다. 그것을 구원받은 증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너는 할례 받으면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사역하는 대상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과 교제하기 위해서, 그들이 복음을 듣게 하는 사역의 한 방법으로 할례를 받도록 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할례가 구원의 본질이 아니라 방법론일 따름입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때로 취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그 영혼을 구원하고자 할 때 하나님이 새로운 길을 내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 철학
“내가 모든 사람에 대해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됐습니다. 이는 내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유대 사람처럼 된 것은 유대 사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나 자신이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된 것은 그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떠난 사람이 아니지만 율법 없는 사람들에게 율법 없는 사람처럼 된 것은 그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에게 내가 연약한 사람처럼 된 것은 연약한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어떻게든지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함입니다”(고전 9:19~22).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나도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통해서 그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기에 그들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내색할 필요 없이 율법 없는 자처럼 헬라의 문화나 시구를 인용하거나 당시 사상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구약을 인용해서 복음을 전하고, 구약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의 수준에 맞춰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도에게는 할례를 받지 않게 하고,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도록 한 것입니다. 이율배반적이고,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꾸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목적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 철학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결정을 할 때 매우 중요한 것은 이 결정을 함으로써 그 상황을 지켜보거나 내용을 듣는 이들이 더 구원을 얻든지, 그 반대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는데 도움이 되는지, 걸림돌이 되는지를 기준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막힌 문 뒤에 열린 문을 
준비하시고, 새로운 길을 여신다
바울, 실라, 누가, 디모데가 한 팀을 이루어서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가지고 그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아시아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새로운 길을 내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 대륙으로 선교지역이 옮겨지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2차 선교여행과 1차 선교여행과의 또 다른 차이점이 여기서 나타납니다. 
1차 선교여행 때는 성령님이 순조롭게 그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2차 여행에서는 성령님이 그들의 계획을 막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대로 문을 열어주시기도 하지만, 계획을 막으심으로 새로운 길을 여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계획한 대로 갔으면 더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이 보호하시기 위해서 때로  가고자 하는 길을 막으시고, 새로운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가고자 하는 길이 한 번도 막힌 적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한두 번, 어떤 분은 여러 번, 가려는 길이 막히는 것을 봅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가? 나를 버리셨는가?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가?’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더 오래 살면서 돌아볼 때 그때 하나님이 길을 막으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나의 계획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막힌 문 뒤에 열린 문을 준비하시고, 새로운 길을 내십니다. 
“성령께서 아시아 지방에 말씀 전하는 것을 막으셨기 때문에 바울과 그 일행은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 무시아 지방 가까이 이르러 비두니아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가게 됐습니다”(6~8절). 
여러 지역 이름이 나옵니다. 2차 선교 여행을 다니는 바울의 선교 지역입니다. 바울은 다소,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등을 통해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남부 지역으로는 다녔는데, 북서쪽으로는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쪽도 큰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아시아 지역을 복음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계획은 비두니아로 가는 것이었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이 계속 막혔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바울과 일행들의 걸음이 예수님과 동행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었기에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평소 성령님과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은 이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평소에 성령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 갑자기 “성령님이 나를 막이셨다”고 할 수 없습니다. 평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기에 ‘아, 허락하지 않으시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평소 마음대로 살던 사람이 중요한 순간, 위기의 순간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평소에 꾸준히, 매일매일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만이 어느 중요한 순간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땅 끝을 향해 새 길을 내시는 하나님
그들은 비두니아라는 북서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성령님이 인도하신 길은 ‘드로아’라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계획에 없었던 곳입니다. 그들은 북서쪽에 사람들이 더 많은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는데, 성령이 드로아로 인도하셨습니다. 드로아는 항구 도시입니다. 앞이 바다입니다. 드로아에서 보면 바다만 보일 뿐입니다. 당시 바울 일행이 드로아에 가면 땅 끝까지 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더 많이 있는 곳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드로아가 없었습니다. 그곳이 바닷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바다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사실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더 빠른 경로가 있었습니다. 빠르고 안전한 길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인도하신 걸음은 홍해 앞바다였습니다. 길이 아니었습니다. 앞에는 바다가 있고, 뒤에서는 이집트의 군대가 쫓아왔습니다. 앞뒤가 막힌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홍해 앞바다로 인도하셨습니다. 왜 그 길로 인도하셨을까요? 바다를 가르시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광야에 길을 내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바다를 가르고 길을 내실 수 있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려고 홍해 앞바다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울 일행을 드로아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길은 막힌 길과 같았지만, 하나님은 막힌 길을 통해 새로운 길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 바울이 환상을 봅니다. 
“한밤중에 바울은 마케도니아 사람이 서서 ‘마케도니아로 와서 우리를 도와주시오’라고 간청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확신하고 즉시 마케도니아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9~10절). 
마케도니아는 오늘의 유럽 대륙입니다. 빌립보는 유럽 대륙의 관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시아를 땅 끝이라고 생각하는 바울 일행을 유럽으로 부르셨습니다. 더 큰 일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땅 끝을 향해서 길을 내시는 분입니다. 계속 땅 끝을 향해 길을 내시는 분입니다. 
온누리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하나님이 하용조 목사님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셔서 사역이 늘어나고, 영역이 확장되고, 온 세상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CGN 방송선교를 통해 온 세상을 바라보도록 하셨고, 로잔대회를 통해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대회를 섬기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누구의 명예를 위해 유치하고, 어떤 이익을 얻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땅 끝을 향하여 하나님이 계속해서 온누리교회의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빌립보는 역사적으로 로마 제국이 첫 번째 시작한 도시입니다. 알렉산더대왕이 세계 정복의 출발점으로 삼은 곳이기도 합니다. 알렉산더대왕의 아버지 이름이 빌립입니다. 그 이름을 따서 도시의 이름을 ‘빌립보’라고 지은 것입니다. 빌립보에서의 승리가 로마 제국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시작이었던 도시에서 하나님은 유럽 복음화의 시작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빌립보를 통해서 유럽 대륙에 복음이 전해지고, 데살로니가와 고린도 여러 지역에도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생각할 수도 없었으며,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빌립보라는 도시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땅 끝을 향하여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막으실 때는 더 큰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삶이 갇힌 것 같을 때 하나님이 놀랍고 새 일을 행하시고 계심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성령님께 귀를 기울이며 하늘 문은 항상 열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늘을 향해 기도하면 막힌 문이 열린 문이요, 막힌 문 뒤에 새로운 길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