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선교팀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아시아 대륙에서 오늘날 유럽인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첫 번째 사역을 한 도시가 빌립보입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로, 로마 시민과 동일한 특권을 누린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 로마의 퇴역 군인들을 많이 이주시켰기 때문입니다. 당시 ‘작은 로마’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유대인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강가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시대 회당이 없었기에 그발 강가에 모여 기도하던 전통을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바울 선교팀은 어느 지역을 가든 먼저 구약의 역사,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강가에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16장 전반부에서 빌립보에 있는 강가 기도처에서 바울 선교팀을 만나 구원을 얻게 된 두 여인을 소개합니다. 한 여인은 루디아입니다. 이 여인은 ‘두아디라’라는 도시에서 옷감을 만들어 파는 사업가입니다. 독신의 재력가입니다. 빌립보의 로마 상류층, 로마 황제와 가까운 이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루디아가 바울 선교팀에게 마음을 열고 집에 초청해서 섬기기도 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바울 선교팀의 중요한 후원자가 되고, 나아가 빌립보 교회의 중요한 일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른 한 여인은 귀신들린 여종 아이입니다. 귀신의 힘을 빌려 점을 쳐 주인들에게 많은 돈을 벌어 주는 소녀였습니다. 이 여종이 바울 선교팀에게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로 당신들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여종이 외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바울이 전하는 창조주 하나님이 아닙니다. 당시 이교도들이 믿던 제우스나 다른 신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여종은 바울 선교팀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계속 침묵하고 있으면 청중들이 오해할 수 있기에 이 여인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자유롭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얻었습니다. 루디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자 했던 여인입니다.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여인이었습니다. 어린 여종은 귀신에게 사로잡혀 비참한 상황 속에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스스로 가까이 하던 사람이나 귀신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나 동일하게 구원하시는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들도 차별 없이 역사하십니다. 어떤 대륙, 어느 민족 사람일지라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악령이 떠나자 또 다른 저항 세력이 등장합니다. 귀신들린 소녀를 이용해서 돈을 벌던 주인이 더는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자 바울과 실라를 고소한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억압과 고통을 이용해서 큰 이익을 누리던 불의한 세력이 예수님의 권세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로마 관리들에게 끌고 가 두 가지 거짓으로 누명을 씌웁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이 로마 시민들에게 와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로마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풍습을 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대중들의 무지한 편견을 이용한 거짓말입니다. ‘유대사람으로서’라는 말은 인종적인 편견에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이 받아 들 일 수 없는 풍습을 전하고 있다’는 것은 로마 권력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식민지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종교를 전파하는 자들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거짓으로 바울과 실라를 고소한 진짜 이유는 귀신들린 소녀를 이용해 돈을 벌던 것을 더는 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에 바울과 실라를 제거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 마음에 있는 인종적인 편견, 자만심, 로마 제국에 대한 교만 등을 자극해서 소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면서 선한 일을 하고도 누명을 쓰고, 로마로부터 나쁜 사람 취급을 받게 된 것은 세 가지 영역의 연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보이지 않는 사회를 혼란시키는 악의 영입니다. 기본적으로 악한 영은 사회를 무조건 분열시키고 혼란시킵니다. 둘째, 비양심적이고 비겁한 지도자들입니다. 셋째, 군중심리에 쉽게 넘어가는 무지한 대중들이 연합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가 못 박히시게 된 배경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거짓으로 고소한 이유는 시기와 질투였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비겁하고 비양심적인 판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중심리에 쉽게 넘어가는 무지한 대중들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연합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듯이, 바울과 실라에게도 놀라운 생명의 역사, 놀라운 반전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날 밤 기도하고 찬송했다!
“한밤중쯤 됐을 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며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자 다른 죄수들이 귀 기울여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이 기반부터 흔들렸습니다. 곧바로 감옥 문이 모두 열리고 죄수들을 묶고 있던 쇠사슬도 다 풀렸습니다”(25~26절).
바울과 실라는 그날 밤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찬송한 게 아닙니다. 억울한 누명으로 심하게 매를 맞고 던져진 지하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신음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원통함을 호소하는 소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여러분, 고난이 찾아오면 저절로 기도가 나옵니까? 아닙니다. 평소에 기도하고 찬송하지 않았던 사람은 고난이 와도 기도하고 찬송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신을 의지할 뿐입니다. 고난이 왔을 때 기도와 찬송이 나오는 사람은 평소에 기도하고 찬송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요셉처럼, 감옥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 형편에 처함으로 인해서 복음이 더 능력 있게 전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고소하고 때리고 가둔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축복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기도만이 아니라 찬송도 했습니다. 기도에서는 도움을 간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찬송은 하나님이 설사 우리 인생을 여기서 끝나게 하실지라도, 도와주시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기도처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또 하박국의 찬양처럼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아무것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이것이 찬송 생활의 능력입니다. 영적 생명력이 나타나는 절정이 찬송입니다. 찬송은 상황이 변하는 기적 이전에 내 영혼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고난 중에 찬송하는 것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가장 올바로 서 있다는 증거입니다. 고난이 없는 것은 분명 복입니다. 그런데 고난 속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은 더 큰 복입니다. 가장 큰 복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 다른 영혼이 구원을 얻는 기회로 삼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날 밤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찬송한 게 아닙니다. 억울한 누명으로 심하게 매를 맞고 던져진 지하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신음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원통함을 호소하는 소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여러분, 고난이 찾아오면 저절로 기도가 나옵니까? 아닙니다. 평소에 기도하고 찬송하지 않았던 사람은 고난이 와도 기도하고 찬송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신을 의지할 뿐입니다. 고난이 왔을 때 기도와 찬송이 나오는 사람은 평소에 기도하고 찬송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요셉처럼, 감옥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 형편에 처함으로 인해서 복음이 더 능력 있게 전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고소하고 때리고 가둔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축복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기도만이 아니라 찬송도 했습니다. 기도에서는 도움을 간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찬송은 하나님이 설사 우리 인생을 여기서 끝나게 하실지라도, 도와주시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기도처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또 하박국의 찬양처럼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아무것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이것이 찬송 생활의 능력입니다. 영적 생명력이 나타나는 절정이 찬송입니다. 찬송은 상황이 변하는 기적 이전에 내 영혼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고난 중에 찬송하는 것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가장 올바로 서 있다는 증거입니다. 고난이 없는 것은 분명 복입니다. 그런데 고난 속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은 더 큰 복입니다. 가장 큰 복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 다른 영혼이 구원을 얻는 기회로 삼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양했을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났고, 옥문이 열렸고, 죄수들을 묶고 있는 쇠사슬이 다 풀렸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문이 열리기만을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통해 복음을 능력 있게 증거하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감옥 문이 열렸을 때 바울과 실라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도망갈 기회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감옥 문이 열리자 간수가 깜짝 놀랐습니다. 죄수들을 묶고 있는 쇠사슬이 풀어지자 죄수들이 모두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로마 군인이 죄수들의 탈옥을 막지 못한 것은 곧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울이 소리칩니다. “당신의 몸을 상하게 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 있습니다.” 간수가 등불을 들고 달려와 바울과 실라 앞에 두려워 떨며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중요한 태도가 잘 담겨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관심, 평소에는 가장 관심 없던 주제가 가장 관심 있는 주제가 됐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에 대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올바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구절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과 실라는 그와 그 집 안 모든 사람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31~32절).
단지 믿으라고만 하고 끝난 게 아닙니다. 무엇을 믿을지를 전해줬습니다. 32절에서 ‘당신의 집안이’라고 하는 육신적인 가족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집안(household)’이라고 번역합니다.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까지 포함합니다. 감옥의 간수가 믿고 세례를 받고, 그 집안사람 모두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날 밤 그 시간에 간수는 그들을 데려다가 상처 부위를 씻어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당장 그와 그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간수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온 가족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으로 인해 기쁨이 가득했습니다”(33~34절).
단지 믿으라고만 하고 끝난 게 아닙니다. 무엇을 믿을지를 전해줬습니다. 32절에서 ‘당신의 집안이’라고 하는 육신적인 가족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집안(household)’이라고 번역합니다.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까지 포함합니다. 감옥의 간수가 믿고 세례를 받고, 그 집안사람 모두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날 밤 그 시간에 간수는 그들을 데려다가 상처 부위를 씻어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당장 그와 그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간수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온 가족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으로 인해 기쁨이 가득했습니다”(33~34절).
감옥에서 간수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장면은 아이러니로 가득합니다. 처음에 간수가 죄수들을 데려가 상처를 씻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물로 자신이 세례를 받게 됩니다.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씻어 주었는데, 이제 바울과 실라가 간수의 죄를 씻어주는 세례를 베푸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간수는 그 집에서 바울과 실라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온 가족이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신라가 있던 감옥에 구원이 임하고, 빌립보 강가에서 만난 사람들과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을 피상적으로 보면 바울과 신라가 감옥에서 기적을 통해 구원 받는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건짐 받는 사건이 아닙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신라를 통해 간수와 그 가족이 구원을 받고, 자유롭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진정 갇힌 자는 바울과 실라가 아닙니다. 감옥을 지키던 간수와 그들을 감옥에 넣은 이들입니다.
억울한 누명, 매질, 감옥이 결코 복음 증거의 역사를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대반전의 역사가 계속됩니다. 복음을 가로막는 걸림돌 같은 일들이 도리어 복음이 증거되는 통로가 되고, 디딤돌이 되는 역사가 계속 일어납니다. 구원받은 간수도 틀림없이 빌립보 교회의 중요한 일꾼이 되었을 겁니다. 전반부 두 여인 루디아와 귀신에 사로잡혔던 여종 그리고 감옥에서 만난 간수가 빌립보 교회의 중요한 멤버가 되었을 것입니다. 루디아는 아시아 사람이었고, 간수는 로마 사람이었고, 어린 여종은 아마 종으로 팔려온 헬라인이었을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처럼, 유대인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그 어떤 차이를 넘어서고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놀라운 역사로 탄생한 빌립보 교회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마지막에 분열을 일으키는 두 사람에 대한 경고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칭찬입니다. 가장 큰 칭찬은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을 계속 따라다니면서 자발적으로 후원하고 돕는 일을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능력 있게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면 기도하고, 찬송하십시오. 감옥에 갇힌 것 같은 상황이라면 기도하고 찬송하십시오. 감옥 문을 열어 주시는 기적이 일어날 때 나만을 위한 기적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세상이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도하고 찬송하십시오. 모든 상황을 전도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 놀라운 구원의 잔치를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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