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하나님에 관한 경험(17)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8. 3. 06:01

     이틀 전에 말한 대로 예수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성서와 교회공동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오. 성서와 교회공동체가 바로 예수 경험의 통로이기 때문이오. 이 대목에서 ‘아는’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가 관건이오. 내가 보기에 거기에 이르는 길은 신학이요. 신학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시오. 거꾸로 신학을 두려워하지도 마시오. 신학은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한 논리적 해명이오.

 

     어떤 사람들은 신학을 신앙과 대립되는 것으로 주장하오. 이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없소. 성서가 신학의 결과라는 걸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거요. 신학이 없었다면 성서도 출현할 수 없었소. 구약의 상당 부분은 신명기적 신학에 근거해서 나온 것이오. 신약의 복음서도 각각의 신학에 근거해 있소.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확연하게 다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소.

 

     오해는 마시오. 신학이 만능이라는 말이 아니오. 신학을 모르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말도 아니오. 신학보다 성령의 활동이 우선적이라는 말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요. 신학보다는 신앙 경험이 먼저 있었소.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주도하지는 않지만 늘 토대를 이루고 있소. 앞에서 말한 성경만이 아니라 모든 교리가 바로 신학의 산물이오. 삼위일체, 종말, 창조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이해가 없이 어떻게 성서와 교회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런 이해 없이 어떻게 예수 영접이 가능하다는 말이오?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타당성 여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단 말이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병폐는 신학무용론이오. 이것은 내가 자주 말했으니 길게 설명하지 않겠소. 교회 현장에서는 신학적이지 않은 설교가 더 환영을 받소. 대중적인 목회자들일수록 신학을 경원하오. 신학교 채플에 강사로 온 설교자들도 노골적으로 신학 무용론을 들먹거리오. 이런 상황에서는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처럼 교회를 양적으로 크게 부흥시키는 사람만 인정받게 되오. 언젠가는 그런 부흥도 비누거품처럼 사그라질 것이오.

 

     교회에서 신학의 기능은 세상에서 철학의 기능과 비슷하오. 철학을 몰라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소. 철학적인 반성을 하지 않을수록 세상에 적응을 더 잘 할 수도 있소. 그러나 철학이 없는 삶은 근본이 허약할 수밖에 없소. 요즘 노숙자들이나 감옥에 있는 사람들도 인문학 공부를 한다고 하지 않소. 삶의 근본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만 실제적인 삶도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거요. 신학도 그렇소. 신학이 없어도 신앙생활에는 아무 지장이 없소. 그러나 신학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실제적으로 건강해질 수 있소. 우리의 예수 경험이 개인의 감수성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교 전통에 굳건히 토대를 내릴 수 있소. 그대는 신학공부를 좀 하시오. (2010년 12월11일,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