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개신교회의 성서문자주의와 로마가톨릭의 교황무오설이 똑같다고 말했소.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게 오해의 소지가 있소. 로마가톨릭의 입장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하긴 한데,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소. 지금 우리는 종교개혁 493주년을 주제로 말하고 있지만 로마가톨릭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우리의 반성이 더 중요하오. 성서문자주의가 왜 문제인지를 더 말하겠소.
신앙생활의 왜곡이 거의 성서문자주의에 토대하고 있소. 모이기에 힘쓰라는 말씀에 따라서 교회의 모임이 너무 많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나 ‘예수 성공 불신 실패’라는 구호도 모두 성경구절에 근거해서 기독교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소. 전문적인 신유집회도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근거로 진행되고 있소. 이런 것들을 거론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소. 성경을 문자의 차원에서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기 때문에 벌어지는 기독교 신앙의 왜곡이오.
최근에는 봉은사 땅밟기가 크게 사회적 이슈가 되었소. 몇몇 기독교 청년들이 봉은사에 들어가서 기도를 했다는 거요. 그냥 아무도 모르게 침묵의 기도를 한 게 아니라 대웅전 같은 곳에 들어가서 손을 들거나, 기둥에 손을 대고 기도했다 하오. 기도 내용은 뻔하오. 불교는 우상이니 하루빨리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오. 이게 소위 인터콥 같은 단체에서 주장하는 ‘땅밟기’라 하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오. 여리고 성을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씩 돌았고, 7일 째는 일곱바퀴를 돌았소. 그러자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고 하오.(수 6장) 땅밝기는 여호수아 군대를 흉내낸 거요. 고대 이스라엘의 전쟁 방법을 그대로 따라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순진하다는 것인지, 무모하다는 것인지, 철이 없다는 것인지, 말하기 어렵소. 여호수아 군대가 여리고 성을 공격한 것 자체가 ‘더러운 전쟁’이었소. 300년 만에 다시 돌아와서 땅을 내 놓으라고 하는 것 자체가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요. 여호수아는 당시에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소. 당시에는 국가 개념도 없었고, 생존 자체를 위해서는 부도덕한 전쟁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소. 성서의 그런 보도를 읽는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배울 게 아니라 그들의 역사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배워야 하는 거요.
성서문자주의는 산타클로스가 성탄절 선물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고 머리맡에 주머니를 놓아둔 채 잠을 청하는 어린아이의 태도와 같소. 어린아이라고 한다면 귀엽기나 하지만 어른이 되었는데도 그렇게 한다면 임상실험의 대상이오. 그것을 신앙의 이름으로 강변하면 독선이 되고 마오. 크고 작은 성서문자주의로 인해서 오늘 한국기독교인들의 영혼이 혼탁해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오. (2010년 10월31일,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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