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10월31일, 그러니까 마틴 루터가 열흘만 지나면 만으로 34살이 되던 날에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에 95개 조항의 신학명제를 쓴 대자보를 붙였소. 후대의 교회사가들이 그 날을 종교개혁 기념일로 정했소. 루터가 작심하고 종교개혁 운동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대도 알 것이오. 역사라는 것이 늘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대단한 사건으로 발전하기도 하오. 모든 사소한 것들은 위대한 역사적 사건의 가능성이오.
95개 조항의 신학 명제는 핵심적으로 두 가지를 다루고 있소. 하나는 면죄부고, 다른 하나는 교황무오설이오. 두 가지 모두 나름으로 신학적 근거로 있고, 목회적 필요성도 있소. 그래도 루터가 볼 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의 차원에서 정당하지 않았소. 어느 쪽이 옳은 거요? 우리는 당연히 루터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 저간의 형편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오.
우선 면죄부요. 면죄부 교리는 연옥에 가 있는 조상의 영혼을 위해서 후손이 면죄부를 사면 조상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이오. 말이 안 되는 주장이라고 그대는 생각할 거요. 물론 말이 안 되오. 로마가톨릭도 더 이상 면죄부 교리를 가르치지 않소. 그 교리가 순수한 교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베드로 성당 건축과 연관해서 나온 것이라서 문제가 더 심각한 거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소. 조상의 영혼을 후손들은 늘 걱정하오. 이미 지옥에 간 조상의 영혼이라고 한다면 염려할 것도 없소. 문제는 연옥에 간 영혼이오. 이로 인해 불안해하는 이들이 면죄부를 통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오.
이 면죄부가 오늘날 하나님의 것을 떼어먹지 말라는 식으로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십일조와 무슨 차이가 있겠소? 면죄부는 성경에 나오지 않고 십일조는 나온다는 말로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소. 성경에 나오는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건 아니오. 무조건 따라야 한다면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에 속한 이들이 일반 기독교 신자들보다 성서를 더 정확하게 따른다고 할 수 있소. 면죄부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냥 받아들일 수 있는 거라는 뜻이오. 루터는 그것을 철저하게 배격했소. 아니,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신학적으로 토론하자고 제의한 거요. 그 제의를 로마교황청은 받아들이지 않고 억압적으로 처리하고 말았소. 그렇게 하면 한풀 꺾이리라고 기대했겠지만, 오히려 그런 태도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고 말았소. 그 배경에는 변혁의 세력으로 부상한 독일 상공인 중산층이 자리하고 있소. 이런 깨어 있는 평신도들이 없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도 앞서 실패했던 수많은 종교개혁과 마찬가지로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았소. (2010년 10월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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