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시가 우리를 건드린다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7. 12. 07:00

    어제는 김응교 시인이 소개한 파블로 네루다의 시 ‘시’ 전문을 그대에게 읽어드렸소. 내게 능력만 있다면 저 시를 해석해주련만 그게 안 되오. 성서는 해석이 되는데 시는 해석이 안 된다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오. 내 수준에서 해석하라면 해석 못할 것도 없소. 그러나 시의 깊이에 들어가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는 해석이라면 하지 않느니만도 못하오. 1연 6째 줄부터 나오는 내용을 먼저 읽어보시오.

 

아니다. 그건 들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니며 침묵도 아니었어.

내가 헤매고 다니던 길거리에서,

밤의 한 자락에서,

뜻하지 않은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혼자 돌아오는 길에서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것이 나를 건드렸어.

 

     네루다는 시를 배운 것이 아니라 시가 자기를 찾아온 것이라고 말하오. 이것은 모든 시인의 똑같은 고백이오. 마치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소. 절대적인 경험은 훈련을 통해서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밖의 세계로부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오. 그래서 그것은 책에서 읽을 수 없는 것이오. 내 이야기는 그만하고 김응교 시인의 해설을 직접 들려줄 테니 귀를 기울여보시오.

 

     진짜 시는 남의 말을 듣거나 책을 읽고 모방하거나 침묵의 영성 속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침묵에는 여러 종류의 침묵이 있다. 여기서 침묵은 시적 중얼거림을 위한 살아 있는 침묵과는 다른, 네루다가 싫어하는 어떤 부정적인 침묵일 것이다.

젊은 영혼이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내일을 불안해하며 헤매던 길거리에서 시는 화자를 건드렸겠다. 도무지 표현되지 않는, 뚜렷한 행태도 없는 거대한, 아니 크기를 알 수 없는 어떤 영적 덩어리가 ‘어떤 길거리에서’ 정말 뜬금없이, 예고 없이 찾아왔다.

밤의 한 자락에서 혹은 뜻하지도 않게 타인의 얼굴을 보고, 놀랄 때가 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말했었지. 타인의 ‘얼굴’(이때 얼굴은 face가 아니라 타인의 진짜 삶, 일테면 ‘고통의 배꼽’ 같은 것을 말한다.)을 보고 어떤 계시를 느끼고 삶의 존재가 바뀔 때가 있다고, 그때 무한책임을 체감한다고 레비나스가 말했었지.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네루다의 아버지는 자갈 기차 기관사였다. 자길 기차 인부들이 침목 사이에 빠져나간 자갈을 그때그때 채워주지 않으면 철로가 유실된다. 쉬지 않고 자갈을 메워야 하는 인부는 철인이 아니면 버티기 힘들었다. 아버지의 성격은 매우 거칠었다고 한다.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험악한 단어와 악취들... 이후 네루다는 아버지의 얼굴을 타인에게서 많이 발견했을 것이다. 탄광 노동자의 삶의 본 네루다는 탄광에 대한 시를 많이 남기기도 했다. 바로 이때, 타인의 삶을 마주 했을 때에 시는 시인을 건드린다. 톡톡.

또한 역사적 시간이나 사랑이나 열정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시는 우리를 건드린다. 특히 시인을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혼자 외롭게 돌아오는 길에서, 또 이전엔 집단의 일원이었을 뿐인 ‘얼굴 없이 있는 나’를 시는 건드린다. 과거의 원효가 당나라로 가던 중 해골의 물을 마시고 ‘화쟁’(和諍)의 원효로 바뀌듯이, 폭력적이었던 과거의 사울이 다마스커스에서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사도 바울로 존재가 바뀌었듯이 시는 그렇게 소리없이 우리를 건드린다. 톡톡.

나의 주체를 못 찾고 남의 얼굴 마스크를 쓰고 있는 줄도 모르는 나에게, 정작 자기의 얼굴이 없는 나에게 ... 바로 이때 그것<詩>이 우리를 건드린다.(it touched me) 바로 이때야말로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메시아적 순간일 터이고, 알랭 바디우가 말했던 진리-사건의 순간일 것이다.

기는 우리를 불러 시인으로 만든다. 시는 사람에게 창작된 창작물일 뿐이라는 생각은 여지없이 깨진다. <시>야말로 시인을, 독자를 부르는 주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점은 여기서 전복된다. 시인은 자연의 소리, 영혼의 소리를 받아쓰는 대필가가 아닌가.

 

     위 김응교의 해석이 어떻소?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게 들리오. 시 경험은 하나님 경험과 어찌 그리 비슷한지 놀라운 따름이오. 전적인 타자 경험이고, 영혼의 울림이고,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고,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고, 잠에서 깨는 경험이오. 성서가 몽땅 그런 것을 말하고 있소. 비록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신앙경험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경험했다면 속내는 모두 동일한 경험이오. 잘 자시오. (2010년 9월28일, 화, 하늘이 한결 높아진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