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모처럼 그대에게 영화 본 이야기를 했소. 옛날에는 사람들이 추석이나 설날 등의 명절에 극장에 많이 갔소. 티브이도 드물고, 평소에 돈도 없이 지내다가 명절에는 돈도 생기고 하니 주로 극장에 갔소. 요즘은 국내외 여행을 많이 가는 것 같소. 경제수준이 높아지고, 핵가족의 구조화되고 보니, 명절 풍속이 많이 달라지고 있소. 어제 본 영화의 느낌이 강해서 오늘도 한 마디 더 해야겠소.
키가 10 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는 소인 소녀 아리에티는 호기심이 많소. 별장의 마루 밑에서만 지내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진 탓인지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부모의 말을 별로 새겨듣지 않소. 첫 장면은 어제 간단히 설명한 것처럼 별장 정원에서 재미있게 놀던 아리에티가 심장 수술을 앞두고 휴양 차 외할머니 별장에 온 소년 쇼우와 만나는 것이오. 그렇게 영화가 시작되오. 아리에티는 발랄하고 용감하고 침착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소인 소녀요. 이 영화에는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개미>에서 개미의 시각으로 인간 세상이 묘사되는 것처럼 아리에티의 시각으로 사람의 세상이 묘사되고 있소. 각설탕과 티슈를 훔치러(빌리러) 마루 밑에서 위로 올라와 거실과 침실로 들어갈 때 전기 콘센트 통로를 통해서 올라가오. 벽시계의 울림이 천둥소리와 같소.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인간의 삶에 기대서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운명이 처절하오. 그렇지만 인간에게 틀기지만 않는다면 나름으로 행복한 삶이오. 아리에티의 가족들이 짐을 싸서 이사를 가는 장면에서 나는 오래 전 빙하기를 맞아 거처를 옮기던 인간의 조상인 한 유인원 가족이 생각났소.
오늘 아침에 커피를 끓이기 위해 부엌의 찬장 문을 열면서 혹시 그 안에 아리에티가 없나 살펴보았소. 어느 구석에서 그런 생명체가 놀고 있거나 생존투쟁을 하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오. 아리에티가 반드시 보이는 생명체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오. 인간의 운명에 여러 방식으로 개입하는 요정일 수도 있소. 성서적 표현으로는 천사들이오.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이들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소. 언젠가 인간에게 이 세상을 더 밝히 볼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이전에 못 보던 것들을 많이 보게 될 것이오. 현미경 덕분으로 이전에 못 보던 세균의 존재를 알아본 것처럼 말이오. 우리의 눈이 더 밝아지면, 완전히 밝아지면 그때는 하나님도 볼 것이오.
나는 앞으로 아리에티를 찾는 일에 흥미를 느낄 것 같소.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 뒤에 숨어서 그 소녀가 숨을 죽이며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오. 아파트 베란다의 꽃나무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을지도 모르오. 혹시 내 외투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니겠소? 아리에티는 내가 버리는 휴지 조각이 필요할지 모르오. 낡은 내 손수건은 아리에티의 침대를 멋있게 장식해 줄 수 있소. 내 집에는 각설탕이 없으니 대신 내 딸들이 어렸을 때 소꿉놀이 하던 반찬통에 꿀을 담아서 선물로 주고 싶소. 내 주변 어디에 아리에티가 있는지 천천히 찾아봐야겠소.(2010년 9월22일, 수, 종일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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