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할 양식(3)-
일용할 양식과 관계된 두 번째 이야기는 성만찬이오. 어제는 오병이어에 대해서 말했소. 일용할 양식, 오병이어, 성만찬 이 세 가지 모두 먹는 이야기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중에는 먹는 이야기가 제법 많소. 심지어 예수님을 가리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긴다는 평판도 있었다 하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그런 평판이 따라다녔다는 게 이상하지 않소? 이상할 게 하나도 없소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삶을 누리셨소. 다른 게 하나도 없었소. 그는 참 인간(vere homo)이셨소. 먹고 배설하는 행위가 없이는 인간이라 할 수 없소. 즐겁게 먹고 즐겁게 배설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라오. 거룩은 세속과 완전히 분리된 세계가 아니오. 세속에서 거룩한 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것이오. 그래서 예수님은 시장바닥과 결혼잔치 자리 같은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셨소. 그런 곳에서는 먹는 것과 마시는 일이 빠질 수 없는 법이오.
예수님이 육체적 쾌락과 탐식에 빠졌다는 뜻이 아니오. 그를 단순히 휴머니스트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오. 먹는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신 일도 있었소.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소. 그중의 하나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유혹이었소.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라는 것이오. 이건 예수님의 자의식에 관한 문제요.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시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거요. 그렇다면 인류의 숙원인 먹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지를 확인하면 되는 거요.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하셨소. 생명의 차원을 떡으로부터 말씀으로 끌어올린 것이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맞기는 맞는 거요? 떡은 육신의 양식이고, 말씀은 영의 양식이라는 뜻이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렇지 않소. 사람에게 육신과 영혼이 구분되기는 하지만 분리되지는 않소이다. 모든 것이 통합적으로 하나의 생명이오. 떡과 말씀도 역시 통합적인 거요. 이렇게 일단 정리하면 되오. 말씀이 없이 떡만 준비하면 떡의 참된 의미가 실종되고 마오. 떡을 독점하려고 하오. 떡을 먹어도 만족이 없소.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재 있는 떡을 함께 먹는 일이 중요하오. 궁극적으로 결국 먹는 일은 죽음과 동시에 그쳐야 하오. 그때는 전혀 다른 생명 형식으로 변화될 것이오.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준비해야 하오. 여기서 말씀은 바로 하나님 자체를 가리키오. 이것의 종교적 징표가 바로 성만찬이오.
우리는 성만찬에서 빵을 예수님의 몸으로, 포도주를 피로 믿소. 로마가톨릭교회는 화체설을 따르지만 개신교회는 상징설, 임재설, 또는 기념설을 따르오. 어떤 쪽이든지 중요한 것은 빵과 포도주라는 사물을 영의 차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오. “이것은 내 몸이니, 이것은 내 피니...”라는 말씀을 사실적으로 받아들여도 좋소. 빵과 포도주는 신의 몸이고 신의 피요. 인간이 아무리 날고 기는 기술을 개발한다고 하더라도 빵과 포도주를 만들지 못하오. 그것은 하나님의 각별한 은총이오. 우주 어느 곳에서도 이런 빵과 포도주가 생산되지 못하오. 오직 지구에서만 가능한 기적이오. 그런데 말이오. 지구가 언제까지 이런 것을 생산할 것 같소? 언젠가 빵과 포도주를 얻지 못하는 날이 올 거요. 지금 우리가 얼마나 큰 은총을 누리고 있는지 상상해보면, 시편기자들처럼 기뻐서 찬양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성만찬에서 신앙적으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요.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사역이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를 구원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소. 그걸 믿는다는 건 쉽지 않소. 하나님이 하필 자기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셨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오. 이 문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한 마디로 줄이겠소. 다른 길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라는 게 대답이오. 성만찬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신앙적 의미는 성만찬에 참여하는 이들의 친교요. 한 빵과 한 잔을 먹고 마셨다는 것은 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는 뜻이오. 여기서만 참된 친교가 가능하오. 실제로 형제와 자매처럼 살기는 어려울 거요. 세상은 오히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부추기고 있소. 교회에서도 형제와 자매로 지내기가 쉽지 않소. 이런 문제는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소. 예수 그리스도 사건으로 깊이 들어가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소. 그대가 살아가면서 형제자매와의 진정한 친교가 흐트러지는 걸 느끼게 되면 다시 성만찬 영성으로 돌아오시오. 우리는 이렇게 실패를 통해서 다시 건강한 영성을 회복할 수 있을 거요.
이제 결론은 다음이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바로 성만찬이오. 빵을 독점하는 사람은 없소. 잔을 독차지 하는 사람은 없소. 모두가 똑같이 빵을 먹고 잔을 마셔야만 하듯이 일용할 양식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먹을거리가 되도록 힘을 써야 하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그렇게 살아야 하오. (2010년 8월21일, 토, 더위와 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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