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주기도(31)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6. 30. 07:19

-일용할 양식(1)-

 

    주기도를 주제로 한 매일 묵상을 시작하면서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어느 정도 언급했다는 걸 그대도 기억하실 거요. 특히 남한이 몇 년 치씩 먹을 걸 쌓아놓은 채 일용할 양식이 없는 북한을 모른 척한다는 사실을 지적했소. 이런 태도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소. 부자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 지옥에 갔고, 나사로는 부자의 문지방에 기대서 얻어먹고 살다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하오.(눅 16:19-31) 어떤 목사는 나사로는 하나님을 잘 믿었고, 아브라함은 믿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했소. 좀 웃기는 설명이오. 웃기는 정도가 아니라 해괴한 설명이오. 그 이야기는 그런 걸 말하지 않소. 아주 단순하고 분명한 가르침이오. 부자는 살았을 때 풍족하게 살았고, 거지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나사로는 위로를 받아야 하고 부자는 괴로움을 받는 게 공평하다는 것이오. 부자로서는 억울한 일이지 모르나 어쩔 수 없소. 부자는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즉 절대생명이신 하나님 앞에 서야한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기 세계에 갇혀서 살았던 것이오. 그것이 결국은 거지 나사로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킨 것이오. 오늘의 시대정신인 대상화, 타자화, 도구화가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인류의 먹을거리를 구한다는 뜻이오. 이는 곧 “인간은 먹어야 산다.”는 엄정한 사실을 가리키오. 그것이 창조 원리요. 사실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소. 짐승들은 거의 입으로 먹고 장을 통해서 소화시킨 뒤 배설하는 방식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소. 일용할 양식은 곧 생명의 양식이오. 모든 사람은 먹을 권리가 있소. 그 권리를 빼앗을 권리는 사람에게 없소. 먹을 권리만이 아니라 배울 권리와 치료받을 권리, 주거의 권리도 중요하오. 이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요. 이런 권리가 보장된 나라를 일반적으로 선진국이라고 부르오. 지금 우리나라에도 굶는 사람들이 제법 있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지 못한 이들이 많소. 그들을 잘 보살필 의무가 국가에 있소. 주기도를 신앙의 중요한 내용으로 삼는 교회는 국가가 이를 책임 있게 감당할 수 있도록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 하오.

 

    거지는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거나, 본인이 게을러서 가난하게 사는 건데 그걸 어떻게 국가가 다 책임을 지냐,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요. 지금처럼 온 세계가 경제만능주의로 흘러가고 있을 때는 이런 목소리가 큰 법이오. 솔직하게 생각해 보시오. 세계 곳곳에 여전히 굶주리는 사람들이 생기는 이유는 전체적인 먹을거리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쪽의 탐욕 때문이오. 한쪽은 생존이 위태로울 정도로 가난하고, 다른 쪽은 향락적이라 할 정도로 소유가 많소. 이런 구조를 바꿀 수만 있다면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은 최소한 굶지는 않소. 그대는 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세계 경제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지면 굶는 사람은 완전히 사라질 것 같소? 탐욕이 줄어들지 않는 한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요. 지구의 자원이 사람의 소비욕을 무한정 채워줄 수는 없으니 말이오. 부유한 기독교 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삶의 행태를 소비에서 공동의 삶으로 바꾸는 게 급선무요.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주기도를 드릴 자격이 없소. 그런 사람은 주기도를 부적이나 장식품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요.(2010년 8월19일, 목, 해와 구름과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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