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근본주의(9)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6. 19. 06:13

     이제 근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접어야겠소. 이 문제는 이렇게 토막글로 다루기에는 주제가 너무 무겁고, 예민하오. 정리한다는 의미로 세계교회에서는 소수에 불과한 근본주의가 한국에서는 왜 다수가 되었는지를 설명하겠소. 그것은 근본주의의 역사적 배경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소. 근본주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는 신앙운동이라는 것은 앞에서 밝혔소.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을 인본주의 신학으로 규정하였소. 그 결과는 신학과의 단절이오. 근본주의는 나름으로 신학적인 주장을 하지만 그것은 신학이라기보다는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를 파괴한다는 감정적인 성토에 가깝소.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인간의 말로 깎아내렸다거나, 성령의 활동을 무신하다거나, 성서의 기적을 믿지 않는다는 비판만 반복하는 거였소.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느라 결국 신학 자체를 거부하게 된 거요.

 

     이들 미국의 근본주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들고 왔소이다. 그들이 한국교회의 방향을 어떤 방식으로 세웠을지는 불을 보듯 분명하오. 신학이 없는 교회를 세웠소. 19세기 자유주의 신학만 거부한 게 아니라 2천년 신학의 역사 전체를 거부했다고 보는 게 좋소. 교부신학의 집대성이라 할 삼위일체 개념을 알고 있는 설교자들이 드문 실정이오. 근본주의자들은 삼위일체라는 낱말만을 반복해서 외칠 뿐이지 그 신학 개념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소.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련성을 공부하지도 않는 것 같소. 칼뱅이 말하는 ‘전가된 의’ 개념을 정확하게 알고 설교하는 근본주의 설교자들을 별로 못 봤소. 이들은 몰트만은 물론이고 교부신학자라 불릴만한 판넨베르크도 역시 자유주의 신학자로 보오. 판넨베르크가 이성을 강조하는 신학자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렇게 주장하오. 난센스요. 인간의 언어 자체가 이성적인 작업인데, 어떻게 이성과 믿음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할 수 있단 말이오. 심지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놀던 놀이터에 폭탄을 떨어뜨린 신학자로 알려진 칼 바르트까지 자유주의 신학자로 매도하고 있소.

 

     오늘 한국교회 현장을 신학무용론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도 알고 있을 거요. 그것은 근본주의자들이 뿌린 씨앗의 열매요. 신학이 죽어야만 근본주의가 살기 때문이오. 지금 한국교회는 근본주의와 신학무용론의 악순환이라는 길을 가고 있소. 이걸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난감하오. 신학이 건강하게 살아난다면 근본주의는 설 자리가 없을 거요. 이런 점에서 평신도들의 신학공부는 한국교회가 새로워지는데 필수요. 그런데 근본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 한국교회에는 그런 날이 오기가 힘들 것 같소.(2010년 7월19일, 월, 초복 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