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근본주의(8)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6. 18. 06:11

    근본주의의 태동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했소. 극과 극은 통한다고, 인간 중심적인 자유주의 신학을 필사적으로 막아보려던 근본주의는 또 다시 인간 중심적으로 흘러갔소. 이게 무슨 말인지 몇 가지 예를 들겠소. 쉴라이어마허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있소. 그의 활동 시기는 19세기 전반기요. 그가 강조한 것은 인간의 절대의존 감정이오. 그가 말하는 감정은 단순히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감정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내면의 깊은 종교성을 가리키오. 그를 비판하는 한국의 근본주의는 쉴라이어마허보다 더 심하게 감정 중심의 신앙을 가르치고 있소. 근본주의의 감정은 그야말로 가벼운 감수성에 불과하오. 부흥회에 가서 울고불고 하는 모습에 잘 나타나 있소.

 

     리츨은 기독교의 중심을 윤리에서 찾으려고 했소. 한국의 근본주의는 리츨의 윤리신학을 인간 중심적이라고 비판하오. 그런데 보시오. 그들은 리츨보다 더 심하게, 아니 아무런 신학적인 근거도 없이 인간의 도덕성에 신앙의 무게를 놓소. ‘도덕성의 주도권’을 확보하자는 말을 쉽게 외치고 있소. 설교는 상당한 경우에 도덕론이나 교양윤리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소. 20세기 신(新)정통주의에서 시작했으나 바르트와 달리 실존주의 신학으로 방향을 튼 불트만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주관적 실존에서 찾았소. 근본주의자들은 불트만의 신학을 자유주의라고 매도하오. 그러면서 실제로 자신들은 훨씬 더 사람의 주관성에 떨어져 있소. 성서 해석에서도 역사비평을 거부하고 설교자나 독자의 주관에 치우치고 있소. 큐티식 성서읽기는 이런 실존적 해석과 다를 게 하나도 없소.

 

     위에서 설명한 신학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도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기독교 정통에서 멀리 떨어진 현대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실제로 자신들은 훨씬 더 현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소. 대형 프로젝터를 강단 중앙이나 좌우에 설치해서 설교자의 얼굴을 클로즈업 한 상태로 비추면서 예배를 진행하고 있소. 교회 조직은 공산당의 감시조직 못지않소. 지금 모든 근본주의 교회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아니오. 소리 나지 않게 교회의 전통을 지켜내는 근본주의자들도 많소. 그들이 있기에 그나마 이런 정도로 한국교회가 지탱되는 게 아닌가 싶소. 오늘은 토요일이요. 행복한 주일을 맞으시오. (2010년 7월17일, 토, 비, 구름,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