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만인보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6. 17. 06:49

    고은 시인의 연작 시 <만인보(萬人譜)>가 전 30권으로 완간되었다는 소식을 그대도 들었소? 25년에 걸친 역작이오. 고은 시인이 계간지 ‘창작과 비평’ 이번 여름 호에 이에 관한 본인의 생각을 적었소. 그중의 일부를 여기에 인용해보겠소.

 

     1930년대 후기로부터 기억 속에 쌓이기 시작한 어린시절의 고향 혈친이나 이웃 삼이웃의 세상에서 시작한 만인보가 1950년대 전쟁시기의 격동이나 그 이후 4월혁명 전후, 그리고 1980년대 이래의 광주민중항생 등 여러 변동의 세월에 담긴 인간상의 자취를 거치는 동안 그들 각자의 중단된 삶의 상상적 연장이나 재생을 통해 삶이란 하루만의 단일성 이상의 복합서술이요 요구됨을 깨닫게 마련이었다. 또한 역사 속의 군상들은 그것의 현재화를 통해서 현재의 삶으로 재생되어야 할 터였다. 요컨대 진혼이 아니라 진혼 이후이다.(322 쪽)

     어쩌면 나는 내 글을 나 아닌 타자가 쓰는 것을 꿈꾼다. 이런 지향은 최근에 더 두드러지고 있다. 삶이란 사는 것 이상으로 살아진다는 깨달음,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씌어진다는 것에의 번뇌와 함께 하는 만인보 안의 명멸하는 시의 화자나 시 바깥의 작자는 그 이상의 존재인 어떤 타자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323 쪽)

     만인보 30권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나는 이것이 어서 과거의 책이기를 바라며 이것이 어서 타인의 것이 되어 나로부터 동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어제의 나로서 내일의 나로 일관되기를 거부한다. 내일은 다른 나의 새로운 세상이고자 하는 것이 내 시의 행로이다 변(變)은 불변(不變)으로 저물고 불편은 반드시 변으로 빛난다.(325 쪽)

     인간의 삶이 그 삶의 터전인 땅 자체로 총칭될 때 땅에 쓴 글씨라는 의미는 하늘의 의미마저 땅의 일로 깃들이게 마련이다. 당연히 만인보의 의미도 거기 있어야 한다. 어느덧 안의 노래가 밖의 노래로 나래쳐 가뭇가뭇 떠돌고 있다. 떠돌거라. 떠돌다가 어느 나라의 삶으로 태어나거라. 이로부터 내 알 바 아니다.(325 쪽)

 

     고은은 지금 한국인으로서 노벨 문학상에 가장 근접해 있는 시인이오. 김지하 시인도 물망에 오를만하지만, 그랬을지도 모르고, 경우에 따라서 현실감이 떨어진 너무 고차원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터에 좀 멀어진 것 같소. 박경리 선생님이 아직 살아계셨다면 고은 보다 더 근접했을 것이오. 이런 시인과 소설가를 대한민국이 배출했다는 것은 자랑할 만하오. 이들의 공통점은 한국적인(동양적인) 세계관과 정서를 바탕에 깔고 삶의 아득한 경지를 말한다는 것이오. “이로부터 내 알 바 아니다.”(2010년 7월13일, 화, 낮은 구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