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도덕성과 희년 정신이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할 때 나타난 분명한 표지 가운데 하나는 회심에 대한 고백과 가난한 이들을 존중히 여기는 모습입니다. 믿음의 앞선 세대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가 말씀을 실천하였던 이들입니다. 먼 교회사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에서 일어났던 부흥의 열매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가 없습니다.
장기려 장로님의 아름다운 이야기, 최춘선목사님의 희년 실천의 이야기, 이가순, 이원재 장로님의 삶의 나눔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이야기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한결 같이 볼 수 있는 공통점은 한국 교회 부흥의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흥할 때 나타난 열매입니다.
부흥의 열매는 도덕성과 희년 정신입니다. 신자들이 거룩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칩니다. 그 시작은 회개입니다. 가정에서부터, 교회로 그리고 사회 가운데 죄와 싸우고 회개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정직은 외쳐야 하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연적 현상입니다. 그래서 거짓을 행한 것에 대하여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갖습니다. 죄에 대하여 회개하지 않음은 예수님을 믿지 못함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지 않음입니다. 오직 이곳이 좋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회개가 없기에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도덕성입니다. 문화적이고, 창조적 존재이지만, 자연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덕적인 존재입니다. 동물의 세계와 다른 것은 도덕성에 있습니다. 양심이 갈등하는 덕의 윤리가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의 근저에는 이러한 도덕에 대한 강한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를 안전하게 이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보고 싶은 것은 이러한 도덕적 삶입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살지 않더라도 교회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리를 지켜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와 교회의 타락에 핏대를 높이면서 욕을 하는 것입니다. 난잡한 삶을 살았던 유명한 화가 피카소를 옹호하는 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천재는 도덕성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마치 불교의 해탈과 같습니다. 해탈한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용서됩니다. 그런데 교회를 향한 시선은 전혀 다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변하지 않는 기준이 있고, 기준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덕의 기준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덕의 원천이 인격이신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는 기준의 해체를 말합니다. 기준 되시는 신을 죽임으로서 기준을 해체하고 서로의 계약과 의견을 따라 살자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난잡함이 시대정신이 되었습니다. 교회도 이러한 시대정신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덕을 벗어던지고 있습니다. 윤리실종시대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윤리를 말하고 덕을 강조하는 것은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서구에서 오랫동안 진행되었던 일들이 이제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 가운데 스며들고 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전략이 성공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은 분명 망하는 시대의 징조입니다. 교회는 망하는 시대를 붙잡고 싸워야 하는데 부화뇌동하고 있습니다. 이념으로 진리를 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전제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념만 옳으면 도덕적 삶에 대하여 눈을 감습니다. 기준의 해체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더 이상 교회에 소망을 갖지 못하고 고통가운데 살고 있는 이유입니다.
윤리가 실종된 시대에는 희년 정신을 가진 신자와 교회가 더디게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을 존중하고, 정직하게 공의를 행하는 일들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정직한 공의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과 정직한 공의에 대하여 말하면 색안경을 낍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과 정직한 공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일입니다. 구분하고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는 일입니다.
희년 정신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아픔이나 슬픔이나 고통이 없도록 서로 돕는 일입니다. 탐욕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불편을 살면서 이웃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아굴의 기도처럼 일용한 양식으로 감사하면서 작은 것이라도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교회가 흥할 때, 말씀이 바르게 선포될 때 나눔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망할 때는 나눔과 섬김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채우기 위하여 교회를 찾고, 직분을 갖습니다. 참으로 서글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와 교회가 죽을 때 희년정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희년정신이 보이지 않는다면 교회각 생기를 잃었다는 증거입니다.
탈 교회 시대를 맞는 일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이 역사할 때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임하여 교회의 미끄러짐을 막아주시고 다시금 도덕성이 회복과 희년정신의 실천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교회가 흥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신동식 목사(문설연 대표/ 빛과소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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