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가 주는 해악 가운데 하나는 가나한 사람들의 양산입니다.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들은 가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누가 가난을 원하겠습니까? 하지만 자본주의의 현실은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존중히 여기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무시합니다.
초대교회를 본 받고 싶은 마음이 모든 교회에 있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까지 합니다. 참으로 엄청난 믿음입니다.
성령의 임재가 있고,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하는 초대 교회의 아름다움은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성도의 교제가 넘치고,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을 보면 아주 놀라운 믿음의 열매를 봅니다. 그것은 공동체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자발적 불편을 감당하는 성도들의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필요를 넘는 것은 가난한 성도를 위하여 나눔을 가졌습니다.
당시의 가난의 지표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누가의 기록은 교회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특별히 두 사람의 이름이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한 사람은 정직하고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눠주기를 기뻐하였던 구브로 사람 요셉입니다. 사도는 그 이름을 바나바 즉 위로의 아들이라고 바꿔졌습니다.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졌습니다.
반면에 아나니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이들은 거짓으로 의로움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헌신을 하지 안고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말은 잘 하는데 실제의 나눔은 없습니다. 마치 교회의 문제를 잘 지적하면서 헌신하지 않습니다. 말과 행함이 일치되지 않는 신앙입니다. 사도들은 이들을 책망하였고 하나님은 심판하셨습니다. 교회를 허무는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는 탐욕과 거짓말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오늘도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이 존재합니다. 이들을 존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인정받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교회가 초대교회를 본 받습니다. 마음으로도 가난한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는 것은 삶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부활 신앙은 자기 욕망을 죽이고 가난한 성도와 이웃을 향하여 재능과 시간과 물질등을 흘려 보냅니다. 이러한 믿음이 되기를 오늘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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