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문명과 존재의 불안
그대도 오늘 하루 햇살과 바람을 느꼈을 거요. 오늘 내가 경험한 햇살과 바람은 얼마나 감미로운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였다오. 오랜 만에 낙동강 앞에 섰었소. 그 기분을 아실 거요. 강이 앞에 있소이다. 어딘가에서 모인 작은 물방울들이 이런 강을 이룬 거요. 놀랍지 않소? 수십만 년, 수백만 년을 굽이굽이 내려오면서 자기 스스로의 길을 냈소. 장하지 않소? 오늘 내가 소속된 ‘대구경북 목회자 정의평화 실천협의회’는 낙동강 정비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기도회 및 생명평화 순례 모임을 열었소. 거기서 나는 설교를 맡았소. 10분에 끝난 설교요. 그 설교 요약문을 그대에게 주는 말로 대신하리다.
창세기 1-11장은 소위 원역사라고 한다. 역사의 원류라는 뜻의 원(原)역사에는 창조, 유혹, 타락, 형제 살해, 노아 홍수, 바벨탑이 나온다.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바벨탑으로 끝나는 역사이다. 인류 전체의 운명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의 12장부터는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등장한다. 그 족장들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문명의 출발이다. 이런 구도에서 볼 때 바벨탑 사건은 두 역사의 경계에 놓인다. 원역사와 문명의 역사 사이에 놓인다. 바벨탑 사건으로부터 인간의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창 11:1-9절의 바벨탑 사건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사람들이 시날 평지에서 벽돌을 구워 탑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들은 탑을 하늘에 닿게 하여 그것을 건축한 사람들의 이름을 내고, 그들이 지면에 흩어지는 걸 피해보자고 의논했다. 이것이 바벨탑을 건축하게 된 동기이다. 여호와께서 그것을 좋지 않게 보셨다. 사람들의 말을 혼잡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지면에 흩어지게 했다. 사람들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것이 바벨탑을 건축의 비극적인 결과였다. 결과가 비극적이었다면 그 동기도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 이 바벨탑 사건은 문명에 대한 성서의 분명한 시각인가? 그리고 그런 시각은 첨단의 문명사회를 구가하는 오늘에도 역시 정당한가?
우선 바로 위에서 언급한 바벨탑 건축의 동기를 다시 정리해보자. 그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름을 내는 것이다.(창 11:4) 지난 인류의 역사에 나타난 모든 거대한 건축물에는 이름을 내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이 작동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 동로마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도시는 각각 영웅들의 이름이 따라다닌다. 성당이나 교회당 건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랑의 교회가 2천100억 원을 들여서 교회당을 짓는다고 한다. 순수한 마음도 있겠지만 가장 깊은 곳에는 개인이나 교회의 이름을 내고 싶다는 본능이, 또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는지.
바벨탑을 건축하게 된 또 하나의 다른 동기는 지면에 흩어지는 걸 피하자는 것이다.(창 11:4) 그것은 노아 홍수를 염두에 둔 것이다. 고대사회에는 자연재해, 전염병, 전쟁 등으로 가족이나 씨족 전체가 전멸당하는 일들이 흔했다. 좀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빙하기에 유인원들도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이건 존재의 불안, 즉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이런 불안은 대형 건축물을 요구한다. 거기에 마음을 붙이면 불안이 어느 정도는 해소될 것이다. 성서는 그것 자체를 죄라고 말한다.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물의 심판을 내리지 않겠다고 무지개로 약속을 하셨다. 사람은 그걸 믿지 못한다. 하나님 약속을 믿지 못한다. 자연을 신뢰하지 못한다. 결국 자기 손으로 무언가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우리는 지금 소위 ‘4대강 정비사업’의 하나인 달성보 건설현장에 나와 있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가 결국 바벨탑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내야겠다는 욕망과 미래에 대한 존재의 불안과 연관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여기에는 대통령의 치적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이 핵심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렇게 졸속적이면서 불법적이고, 강제적으로 진행될 수는 없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 자리에 선 우리를 포함한 현대인 모두가 이런 종류의 프로젝트에 영혼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할 말이 없다. 바벨탑을 세워서라도 물질적으로 잘 살아야 한다는 신념이 무지개를 증거로 삼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우리에게 더 매력적이지 않는가. 저 달성보 건축 현장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2010년 2월23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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