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이 있었습니다. 닉슨 대통령 때 백악관 참모들과 함께 거짓으로 음모를 꾸민 일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그때 백악관 고문이었던 척 콜슨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때 일을 회개하고, 자신의 신앙을 간증하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10명 남짓의 참모들이 그 거짓을 꾸미고 나서 조사가 시작된 지 두 주가 되지 않아서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되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위협은 어떤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한 위협도 아니었고, 또 절망할 만한 그런 상황도 아니었지만,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 더이상 자신을 희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실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지킬 수 있지만, 거짓을 위해서 희생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거짓이 탄로 나는 것을 보면 함께 거짓을 꾸몄던 이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배반하고, 진실을 토로하는 이들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과학자인 파스칼이 쓴 <팡세>를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는데 부활한 것처럼 주장하고, 그들의 주장을 진실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신약 성경을 만들었고, 사람들에게 전파한다고 말합니다. 그 모든 주장을 무너트리는 것이 제자들이 받은 고난과 핍박 그리고 순교입니다. 파스칼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음모를 세웠다고 가정하고 그 모든 과정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 소수의 제자들이 모여서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부활한 것처럼 만들자고 모의해서 그것을 지켜가는 과정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불려가고, 잡혀가고, 핍박당하고 목숨을 위협받으면서 단 한 사람이라도 ‘사실 이것은 거짓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모든 것이 무너졌을 것이다. 사람의 근본은 너무나 약한 존재이다. 특별히 협박과 위협, 뇌물에도 약하다. 제자 중 단 한 사람이라도 그것이 거짓이라고 고백했다면 그 이후 기독교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단 한 사람도 자신들이 거짓으로 꾸민 일을 위해서 배반하지 않고, 모두가 한결같이 거짓을 위해서 고난받고 순교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미국 최고의 권력에 있었던 사람들과 같은 권세와 힘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힘없고 연약한 갈릴리 사람들이 당시 최고 권력자들에게 잡혀가고 핍박을 받기 시작했을 때 있지도 않은 일, 자신들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 거짓을 지키려고 <사도행전> 이후에 나오는 모든 고난과 핍박을 한결같이 지켜 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는 곳마다 반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초기 제자들이 그 거짓을 지키는 데 성공했고, 그 이후 사람들도 그 거짓을 믿고 지키는 데 성공했고, 오늘 우리도 거짓에 기초한 일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전파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진실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진실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지킬 수 있지만, 거짓을 위해서 희생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거짓이 탄로 나는 것을 보면 함께 거짓을 꾸몄던 이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배반하고, 진실을 토로하는 이들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과학자인 파스칼이 쓴 <팡세>를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는데 부활한 것처럼 주장하고, 그들의 주장을 진실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신약 성경을 만들었고, 사람들에게 전파한다고 말합니다. 그 모든 주장을 무너트리는 것이 제자들이 받은 고난과 핍박 그리고 순교입니다. 파스칼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음모를 세웠다고 가정하고 그 모든 과정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 소수의 제자들이 모여서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부활한 것처럼 만들자고 모의해서 그것을 지켜가는 과정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불려가고, 잡혀가고, 핍박당하고 목숨을 위협받으면서 단 한 사람이라도 ‘사실 이것은 거짓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모든 것이 무너졌을 것이다. 사람의 근본은 너무나 약한 존재이다. 특별히 협박과 위협, 뇌물에도 약하다. 제자 중 단 한 사람이라도 그것이 거짓이라고 고백했다면 그 이후 기독교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단 한 사람도 자신들이 거짓으로 꾸민 일을 위해서 배반하지 않고, 모두가 한결같이 거짓을 위해서 고난받고 순교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미국 최고의 권력에 있었던 사람들과 같은 권세와 힘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힘없고 연약한 갈릴리 사람들이 당시 최고 권력자들에게 잡혀가고 핍박을 받기 시작했을 때 있지도 않은 일, 자신들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 거짓을 지키려고 <사도행전> 이후에 나오는 모든 고난과 핍박을 한결같이 지켜 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는 곳마다 반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초기 제자들이 그 거짓을 지키는 데 성공했고, 그 이후 사람들도 그 거짓을 믿고 지키는 데 성공했고, 오늘 우리도 거짓에 기초한 일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전파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진실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회심의 물결,
예수 믿고 구원받는 물결
<사도행전> 4장에서도 성전 문 앞에서 일어난 기적에 의한 파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서 날 때부터 한 번도 걷지 못한 이를 걷게 하고, 뛰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로 인해서 두 가지 파동이 일어납니다. 첫째, 그 기적을 보고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든 사람들이 있었고, 그 몰려든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이 행한 기적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를 통해 이 기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남자 수만 5천 명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여성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았기에 주로 인구를 성인 남자 수로 계산했습니다. 남자의 수만 5천 명이라는 것은 가족까지 합하면 적어도 1만 명 이상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인구를 적어도 5~8만 명 정도로 봅니다. 10만 명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고, 이 사건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는 가장 강력한 뉴스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베드로가 설교하고, 많은 사람이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회심의 물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물결이 첫 번째 파동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물결
<사도행전> 4장에서도 성전 문 앞에서 일어난 기적에 의한 파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서 날 때부터 한 번도 걷지 못한 이를 걷게 하고, 뛰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로 인해서 두 가지 파동이 일어납니다. 첫째, 그 기적을 보고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든 사람들이 있었고, 그 몰려든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이 행한 기적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를 통해 이 기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남자 수만 5천 명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여성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았기에 주로 인구를 성인 남자 수로 계산했습니다. 남자의 수만 5천 명이라는 것은 가족까지 합하면 적어도 1만 명 이상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인구를 적어도 5~8만 명 정도로 봅니다. 10만 명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고, 이 사건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는 가장 강력한 뉴스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베드로가 설교하고, 많은 사람이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회심의 물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물결이 첫 번째 파동입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들,
진실을 가두는 사람들
진실을 가두는 사람들
둘째, 기적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고 구원받는 일을 보면서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진실을 가두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을 오늘 본문 1절에서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로 성전을 중심으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건이 성전 문 앞에서 일어났고, 또 베드로와 요한이 여전히 성전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둡니다. 성전 경비대장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녁에는 유대 율법상 재판할 수 없기에 하루를 넘겨 이들을 잡아 가두고, 그다음 날 긴급하게 대제사장들이 소집되어 나옵니다. 거기에 나오는 이름이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그리고 대제사장의 가문들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안나스와 가야바의 이름입니다. 안나스는 주후 6년부터 15년까지 세례 요한 때 대제사장이 된 사람입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다윗 왕국 시대부터 사독의 후예들이 이어서 맡게 되어 있는 직책입니다. 그런데 안나스는 최초로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된 대제사장입니다. 역사적 정통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정치적이었으면 로마 총독의 신임을 받아서 임명되었을까요? 로마법을 유대에도 그대로 적용한 시대가 바로 안나스 때부터 입니다. 매우 나쁜 의미의 정치적인 인물이고, 로마 정부의 하수인처럼 일했던 사람입니다. 안나스의 다섯 아들도 대제사장이 됩니다. 역사적 정통성이 아니라 정치적 타협으로 대제사장 가문이 된 사람들입니다. 안나스의 사위가 가야바입니다. 가야바가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을 신문한 사람은 안나스입니다. 현직 대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먼저 불러다 심문했습니다. 현직은 가야바이지만 실체적인 힘은 안나스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나오는 이름이 요한입니다. 안나스의 아들입니다. 안나스가 살아있는 동안은 이 성전을 중심으로 한 산헤드린 공회는 그가 장악하고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한 사람이 사유화하고, 유대 사회를 부정한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안나스와 가아뱌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인물들이 다시 소집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 진실이 무엇인지 깨닫고,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라면 그때라도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는데,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처럼 불의와 불법을 행하면서 진실을 가두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너희들이 누구의 권세와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은 대제사장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데 왜 허가 없이 가르치느냐?”고 심문합니다. 본질이 다릅니다. 성전 문 앞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왜 허가 없이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합니다. 겉으로는 법을 따지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궁색한 질문입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절대로 위협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십자가에 죽게 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것은 선한 일 아니냐? 걷지 못한 이를 걷게 하는 것은 선한 일인데 당신들은 그것을 비난하느냐?”고 담대하게 증언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 옆에 걷지 못했다가 걷게 된 장본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이 알던 그 사람이 그렇게 변화됐으니 기적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나가라고 하고 회의를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 더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거나 전파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 다시 불러서 위협하면서 명령을 하자.”
보통 유대 사람이라면 당시 대제사장과의 사두개인들의 권력을 알기 때문에 마지 못해서라도 “알았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절대로 굴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당신들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 무엇이 옳은지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여기에 실제 일어난 일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구원 얻는 사람들과 진실을 가두려고 불의와 불법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둡니다. 성전 경비대장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녁에는 유대 율법상 재판할 수 없기에 하루를 넘겨 이들을 잡아 가두고, 그다음 날 긴급하게 대제사장들이 소집되어 나옵니다. 거기에 나오는 이름이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그리고 대제사장의 가문들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안나스와 가야바의 이름입니다. 안나스는 주후 6년부터 15년까지 세례 요한 때 대제사장이 된 사람입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다윗 왕국 시대부터 사독의 후예들이 이어서 맡게 되어 있는 직책입니다. 그런데 안나스는 최초로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된 대제사장입니다. 역사적 정통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정치적이었으면 로마 총독의 신임을 받아서 임명되었을까요? 로마법을 유대에도 그대로 적용한 시대가 바로 안나스 때부터 입니다. 매우 나쁜 의미의 정치적인 인물이고, 로마 정부의 하수인처럼 일했던 사람입니다. 안나스의 다섯 아들도 대제사장이 됩니다. 역사적 정통성이 아니라 정치적 타협으로 대제사장 가문이 된 사람들입니다. 안나스의 사위가 가야바입니다. 가야바가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을 신문한 사람은 안나스입니다. 현직 대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먼저 불러다 심문했습니다. 현직은 가야바이지만 실체적인 힘은 안나스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나오는 이름이 요한입니다. 안나스의 아들입니다. 안나스가 살아있는 동안은 이 성전을 중심으로 한 산헤드린 공회는 그가 장악하고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한 사람이 사유화하고, 유대 사회를 부정한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안나스와 가아뱌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인물들이 다시 소집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 진실이 무엇인지 깨닫고,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라면 그때라도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는데,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처럼 불의와 불법을 행하면서 진실을 가두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너희들이 누구의 권세와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은 대제사장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데 왜 허가 없이 가르치느냐?”고 심문합니다. 본질이 다릅니다. 성전 문 앞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왜 허가 없이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합니다. 겉으로는 법을 따지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궁색한 질문입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절대로 위협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십자가에 죽게 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것은 선한 일 아니냐? 걷지 못한 이를 걷게 하는 것은 선한 일인데 당신들은 그것을 비난하느냐?”고 담대하게 증언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 옆에 걷지 못했다가 걷게 된 장본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이 알던 그 사람이 그렇게 변화됐으니 기적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나가라고 하고 회의를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 더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거나 전파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 다시 불러서 위협하면서 명령을 하자.”
보통 유대 사람이라면 당시 대제사장과의 사두개인들의 권력을 알기 때문에 마지 못해서라도 “알았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절대로 굴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당신들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 무엇이 옳은지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여기에 실제 일어난 일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구원 얻는 사람들과 진실을 가두려고 불의와 불법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진실을 가두려는 이유
그들이 왜 진실을 가두려고 했을까요? 첫째, 진실이 전해지면 자신들의 거짓과 불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들의 불의함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고, 거짓으로 군병들에게 돈을 줘서 제자들이 훔쳐 갔다고 거짓말을 시켰습니다. 그 모든 일이 거짓이었습니다. 거짓 위에 세워진 그들의 권력과 위치가 위협을 느꼈습니다. 둘째, 진실이 전해지면 자신들이 가진 모든 권력과 이권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주로 성전을 중심으로 엄청난 이권 누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 판매대를 뒤집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성전에 흠 없는 제물을 가져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정성껏 염소든 송아지든 키운 것을 제물로 드리려고 성전에 옵니다. 그런데 성전에 있는 검시관들이 불합격 판정을 내립니다. 성전에서 파는 제물들은 흠이 있는데도 무조건 합격 판정 도장을 찍어줬습니다. 그러니 누가 힘들게 가져오겠습니까? 제사는 드려야 하고, 제물을 가져와야 하는데 성전에서 사야 도장을 찍어주니까 그것이 관례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권개입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이용해서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부정한 일들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것을 뒤집어엎으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호통치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일들이 그들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분의 이름으로 능력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두렵고 위협적이었습니다. 지금 그들이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궁지에 몰린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름은 없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름은 없다!
두 사도가 진실을 가두려는 이들에게 굴하지 않고 전한 진실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름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예수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아래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11~12절).
두 번씩이나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반복합니다.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부정한 일들을 들춰내는데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사실 베드로도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지 초점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구원을 얻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구원을 얻는 이름이라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보다 중요하고, 시급하고, 궁극적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 산헤드린 공회의 부정부패를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그분의 이름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원화, 다종교, 다문화 시대에 이 말씀이 가장 많은 공격을 받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내에서도 이 말씀은 우리가 덮어둬야 한다. 타 종교를 전도하는 것을 이제 삼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화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이 말씀에 대한 확신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고, 일부 사람들은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고 공격합니다. “왜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들로 혼돈스럽게 할 때 사람들이 확신을 잃어버리고 점점 위축됩니다. 그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자주 쓰는 두 가지 예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산꼭대기 올라갈 때 한 길만 있지 않고 여러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말고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모든 길이 산꼭대기로 갑니까? 가다 보면 골짜기에 빠지고, 낭떠러지도 있습니다. 모든 길이 산꼭대기로 가지 않습니다. 가다 보면 다른 길로 가고, 골짜기로 빠지고, 죽음의 길로 갑니다. 또 다른 예는 어떤 시각장애인 여섯 명이 큰 코끼리를 두고 어떤 사람은 다리를 붙잡았고, 어떤 사람은 꼬리를 붙잡고, 어떤 사람은 상아를 붙잡고, ‘코끼리란 이거다’ 라고 말하는 것을 어느 인도왕이 보고 부분만을 보고 전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는 예화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부분적인데, 어떻게 그것을 절대적 진리라고 할 수 있느냐고 공격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예화를 들을 때 갑자기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절대 굴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답하십시오. “사람들은 부분적인 것을 보지만, 그 모든 것을 보는 왕이 그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볼 수밖에 없지만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왕이 계십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분적인 것만 볼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왕이 계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입니다.
절대 진리가 없다는 거짓된 이념이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과학에도 절대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역사와 모든 일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유일한 구원의 길인 이유는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완전한 사람이 되셔서 스스로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같이, 태어날 때부터 죄를 극복할 수 없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빼내고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죄의 결박을 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죄 짐을 담당하신 구원의 길은 세상의 그 어떤 종교, 철학, 사상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구원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의 이름임을 확신했기에 모든 상황에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핍박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핍박 속에서 전한 담대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지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9~20절).
두 사도의 담대함은 교만에서 나온 주장이 아닙니다. 겸손에서 나오는 순종입니다. 그들을 사로잡은 담대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나오는 용기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압력도 진실을 가둘 수 없습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이 가두는 경우 외에는 세상의 그 어떤 압력과 변화도 진실은 가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판단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이 시대에 증거하는 담대한 증인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예수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예수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아래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11~12절).
두 번씩이나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반복합니다.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부정한 일들을 들춰내는데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사실 베드로도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지 초점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구원을 얻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구원을 얻는 이름이라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보다 중요하고, 시급하고, 궁극적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 산헤드린 공회의 부정부패를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그분의 이름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원화, 다종교, 다문화 시대에 이 말씀이 가장 많은 공격을 받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내에서도 이 말씀은 우리가 덮어둬야 한다. 타 종교를 전도하는 것을 이제 삼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화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이 말씀에 대한 확신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고, 일부 사람들은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고 공격합니다. “왜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들로 혼돈스럽게 할 때 사람들이 확신을 잃어버리고 점점 위축됩니다. 그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자주 쓰는 두 가지 예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산꼭대기 올라갈 때 한 길만 있지 않고 여러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말고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모든 길이 산꼭대기로 갑니까? 가다 보면 골짜기에 빠지고, 낭떠러지도 있습니다. 모든 길이 산꼭대기로 가지 않습니다. 가다 보면 다른 길로 가고, 골짜기로 빠지고, 죽음의 길로 갑니다. 또 다른 예는 어떤 시각장애인 여섯 명이 큰 코끼리를 두고 어떤 사람은 다리를 붙잡았고, 어떤 사람은 꼬리를 붙잡고, 어떤 사람은 상아를 붙잡고, ‘코끼리란 이거다’ 라고 말하는 것을 어느 인도왕이 보고 부분만을 보고 전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는 예화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부분적인데, 어떻게 그것을 절대적 진리라고 할 수 있느냐고 공격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예화를 들을 때 갑자기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절대 굴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답하십시오. “사람들은 부분적인 것을 보지만, 그 모든 것을 보는 왕이 그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볼 수밖에 없지만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왕이 계십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분적인 것만 볼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왕이 계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입니다.
절대 진리가 없다는 거짓된 이념이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과학에도 절대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역사와 모든 일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유일한 구원의 길인 이유는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완전한 사람이 되셔서 스스로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같이, 태어날 때부터 죄를 극복할 수 없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빼내고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죄의 결박을 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죄 짐을 담당하신 구원의 길은 세상의 그 어떤 종교, 철학, 사상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구원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의 이름임을 확신했기에 모든 상황에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핍박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핍박 속에서 전한 담대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지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9~20절).
두 사도의 담대함은 교만에서 나온 주장이 아닙니다. 겸손에서 나오는 순종입니다. 그들을 사로잡은 담대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나오는 용기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압력도 진실을 가둘 수 없습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이 가두는 경우 외에는 세상의 그 어떤 압력과 변화도 진실은 가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판단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이 시대에 증거하는 담대한 증인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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