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

복음 앞에 정직한 교회이고, 목사이고 성도입니까? / 신동식목사

새벽지기1 2023. 12. 11. 06:28

복음 앞에 정직한 교회이고, 목사이고 성도입니까?

 

오늘은 종교개혁 506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포악 속에서 다시금 교회를 회복한 날입니다. 루터의 표현처럼 교종 주위에 파충류라 불리는 추기경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이들이 참 교회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부와 권력에 취해 있는 모리배들로 인하여 교회는 훼손되었고, 신자들을 고통 가운데 살아야 했습니다. 중세의 아합과 이세벨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엘리야의 심정으로 일어나 교종을 책망하였습니다. 주변의 파충류들을 몰아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외침에 반응하였던 독일의 귀족들로 인하여 참 교회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회복되었습니다. 본래의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5세기에 변질되어 가고있는 교회를 회복하고자 끝까지 몸부림쳤던 암브로시우스와 어거스틴의 노력은 힘을 잃었고 점점 교회는 타락하였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교회를 지키려고 몸부림쳤던 믿음의 선배들이 고난의 세월을 견디며 이겨냈습니다. 그 열매들이 왈도와 위클리프와 얀 후스에게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틴 루터를 통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루터와 같은 생각을 가진 개혁가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투쟁하였습니다. 스위스 개혁교회와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동참하였습니다. 여기에 존귀한 쯔빙글리, 볼링거, 파렐, 칼빈, 베자와 같은 인물이 함께 하였습니다. 개혁의 불길은 대륙에서 섬나라 영국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의 녹스와 언약도들, 영국의 퍼킨스와 청교도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서 여러 대륙으로 복음이 증거되었습니다. 이때 로마 카톨릭이 아닌 개신교 신앙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17세기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위그노와 왈도파에 대한 대량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끝날 것 같은 핍박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18세기에 와서야 학살로서의 핍박은 대륙에서는 잠잠하였습니다. 여기에는 30년 전쟁의 여파도 한몫하였습니다.

 

18세기에 불어온 부흥의 소식은 다시금 가슴을 흥분케 하였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웨슬레와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귀한 하나님의 종들이 교회를 다시 세우게 하는 일에 큰 힘을 다하였습니다. 18세기는 무너진 교회와 사회가 다시금 회복되는 부흥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19세기는 또다시 교회에 아픔을 주었습니다. 이성적 철학의 영향과 비평주의 신학의 출몰은 성경의 권위를 유혹하였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 저자들의 신앙고백정도로 추락하자 성경에 대한 비평이 주를 이었습니다. 결국 성경이 주는 절대적 권위가 무너지고, 감정에 충실한 신앙이 되어갔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니체를 비롯한 해체주의 사상과 실존주의 사상은 하나님 자체를 불신하는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20세기는 하나님을 좋은 선생 정도로 각하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죽어가고 사람만 살아났습니다. 그러자 곧 사람도 죽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귀함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세포 중 하나이고, 우연한 존재이고, DNA 배열뿐입니다. 그러자 동물들의 위치가 급상승하였습니다. 사람의 위치가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 동물에게서 위로받고 있습니다. 인격자가 비인격체에게 위로를 받는 준 범신론의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목숨 걸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위로 받고 힘을 얻어 신앙생활 하여야 할 이유가 적어졌습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하고 삶의 관조하는 자세는 가치를 상실하였습니다. 느낌과 즉흥적인 감동이 중요하다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방문해서 30분이면 이 교회에 등록할까 말까를 결정하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지배하는 시대에 교회는 자기 역할의 혼동을 겪고 있습니다. 교회가 복음의 우선성을 가져야 하는지, 생존의 우선성을 가져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복음의 합당한 윤리적 삶도 희미해져 갑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윤리는 존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의 이원론적 삶은 점점 강렬해져 갑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일반적 평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는 사이 탈 교회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교회는 종교개혁 506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선배들의 피 값으로 전달받은 교회가 심한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은 많은 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목사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교회가 적고, 목사가 적다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복음에 합당한 교회와 목사 그리고 성도들이 정말 필요한 시대입니다. 다시한번 복음 앞에 정직한 교회이고, 목사이고 성도인지 물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