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전도서 8장: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

새벽지기1 2022. 12. 10. 08:19

 

해설:

전도자는 왕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그 왕의 권력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2절). 고대 제국에서 왕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에게 저항하는 것은 곧 죽음이었습니다(3-4절). 지혜있는 사람은 왕의 명령에 대해 언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압니다(5절). 

인간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죽을 날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일을 당할 때면 당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을 알맞은 때에 알맞은 방법으로 일어나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6-8절). 

 

전도자는 악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합니다. 악한 일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사람들이 벌을 받기는 커녕 승승장구 하고, 죽고 나서도 사람들에게 칭찬 받습니다(9-11절). 악하게 살면 하나님에게 벌을 받고 경건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고 배웠지만(12-13절), 현실 세상에서는 악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의인이 받는 것 같고,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는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지곤 합니다(14절). 

 

전도자는 그런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써 보았지만, 결국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자신이 뭘 좀 안다고 떠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16-17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끝내 풀리지 않는 질문을 마음에 품고 매일 하루치의 수고를 감당하고 하루치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의 방법입니다(15절).

 

묵상:

믿음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나서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깨달아 알고 그분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고후 5:7)라고 했습니다.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은 이성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차원 너머에 초월적인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창조 세계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보기 때문이요(일반계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특수계시).

마음에서 시작한 믿음은 머리를 끌어 들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이해하고 설명하고 납득하려 합니다. 그런 노력이 없으면 믿음은 맹신으로 전락합니다. 캔터베리의 안셀름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Faith Seeking Understanding)이라는 말로써 믿음의 본질을 담아냈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세계관으로 이 세상을 보고 이해하려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시편 139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작은 머리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아니,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적습니다. 

 

믿음은 신비입니다. 신비는 뭔가 보이기는 하는데 다 보이지는 않는 대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알 것 같은데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알기를 힘씁니다. 하지만 알아갈수록 모르겠다는 느낌만 커집니다. 신기하게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커지는만큼 우리는 그 대상에 더 강하게 사로잡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