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귀신들린 사람 (7)(막 5:5)

새벽지기1 2022. 11. 4. 07:21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막 5:5)

괴성을 지르고 돌로 자기 몸을 해치는 이 사람에게서 우리는 현대인의 자학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그렇지만 특별히 자녀 교육에서 이런 현상은 극에 달합니다. 이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아무리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어떻게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구조화된 문제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학교와 학원과 개인과외 학습에 매달리고 있는 우리는 자녀들은 분명히 자기 몸을 돌로 해치는 귀신들린 사람과 똑같습니다.

 

지난날보다 물량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졌는데도 여전히 자학적인 행태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삶의 본질이 어디부터인가 왜곡되었기 때문이겠지요. 과도한 경쟁을 통해서만 삶을 확인하는데 찌들려버렸기 때문이겠지요.


경쟁은 삶(생명)의 눈높이를 사람에게 둘 때 일어나는 삶의 확인 방식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삶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다면 전혀 다른 삶의 차원이 열리게 될 겁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일상의 조건들까지 해결될 수 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리키는 삶의 태도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말이 조금 옆으로 흘렀군요. 본문의 귀신들린 사람처럼 현대인의 삶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도 역시 자학인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자주 말하지만, 죄책감이 그것입니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심리학과 신앙(신학)을 혼동하기 때문에 신자들을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죄책감은 자학을 통한 심리적 만족에 불과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사로잡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이 나라(바실레이아)에 자학을 위한 자리는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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