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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공의회 기능 상실과 게으른 신앙]ㅡ 보편 신앙을 위하여

새벽지기1 2020. 12. 4. 12:39

[개신교의 공의회 기능 상실과 게으른 신앙]
ㅡ 보편 신앙을 위하여

 

캐슬린 얀센 화이자 백신 연구 개발 책임자는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이제 우리는 이 백신을 세상으로 내보내고 제대로 작용하는 지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앨버트 불라 화이자 최고경영자(CEO) 역시 “오늘은 과학과 인류에게 멋진 날”이라며 성과를 자축했다. (화이자 "임상 중인 백신, 90% 넘게 효과 있다"는 기사 중에서)

 

종교사상은 과학과 달라서 검증이 잘 안 된다. 컨트롤 타워가 없다. 그래서 누가 말하는 어떠한 종교사상이 세상으로 내보내도 되는지, 제대로 작용하는 지, 세상에 내보내지기 전에 검증할 방법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들’이 당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할까? 최대한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대개 어떠한 사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없다. 어떤 원류(source)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확인해 가다 보면, 그 사상이 역사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것이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이야기인지 알 수 있고, 그것이 성공적이었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 우리 시대에 유효한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하는 것이 공부다.

 

우리는 너무 쉽게 믿는다. 마침 성경에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 때문에, 의심을 하면 신앙인이 아닌 것처럼 여긴다. 그런데, 종교권력은 그러한 종교문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한다. 거기에 속아 넘어가면, 우리는 우리의 주권, 주체,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악으로 추락하고 만다.

 

종교사상, 또는 신앙이 건전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신학은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한다. 기독교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계속 펼쳐왔다. 이러한 생각에 꽃을 피운 신학이 중세의 스콜라 신학이다. 특별히 아퀴나스 신학이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가톨릭은 중세의 스콜라 신학, 특별히 아퀴나스의 신학에 따라 이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가톨릭 신학은 굉장히 이성적이다.

여기서 ‘이성적’이라는 말은 ‘보편성’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학사상의 보편성은 ‘공의회’를 통해서 확보되어 왔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신학자들이 모여서 어떠한 신학적 이슈를 놓아두고 공방을 벌인 뒤, 공의회는 서로 합의된 신학사상을 발표했다.

 

공의회를 통해 탄생한 대표적 기독교 정통 신학이 삼위일체론이다. ‘예수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에서 출발한 기독론 논쟁은 결국 기독교의 독특한 사상인 삼위일체론으로 귀결되었다.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의 논쟁을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삼위일체론의 핵심사항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을 확립한데 있다. 공의회를 통해서 유사본질(호모이우시오스)을 주장하던 아리우스는 정죄되고, 이에 맞서 동일본질을 주장한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이 정통으로 인정된 것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 기독교 신학은 동일본질을 정통신학으로 공표하며 그 신학을 유지해 왔지만, 그렇다고 역사에서 유사본질을 주장한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여 바이러스를 퇴치했다고 해서 그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과 같다. 바이러스의 위협은 늘 존재한다. 문제는 그 바이러스를 효과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 몸상태와 백신이 있는지 없는지 이다.

 

종교개혁은 ‘보편’을 앞세워, 또는 ‘보편’을 남용하여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고 전횡을 휘둘렀던 가톨릭의 교권주의자들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킨 중요한 사건이지만, 그에 대한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탄생한 개신교신학(Protestant Theology)은 성경과 은총과 믿음을 강조하지만, 결국 이것은 이성과 보편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신학사상을 검증하여 무엇이 건전성을 확보하고 있는 신학인지 확인해 주는 장치인 공의회 기능을 상실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인들은 은총과 믿음을 통해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 받긴 했으나, 은총과 자유를 통해 ‘내가’ 해석한 성경의 내용이 건전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게 되었다.

 

개신교인들은 ‘해석’이라는 말을 낯설어 한다. 성경 말씀을 그냥 믿으면 되지, 무슨 해석이 필요하냐고 반문한다. 이렇게 ‘반문’ 하는 것 자체가 ‘해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 세상에 해석이 아닌 것은 없다. 인간은 ‘물자체’를 인식할 능력이 없다. 무엇이든지 ‘개념화’시켜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개념화시키는 작업이 이성이고, 어떠한 것을 이성이 올바르게 개념화시켰는지를 검증하는 것이 학문이다. 그렇기에, 신학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개념화시킨 ‘하나님 존재’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검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없으면, 악마를 하나님처럼 잘못 개념화시켜 놓고, 그것이 참 하나님인 것처럼 숭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다. 이것은 결국 생명을 죽이고 만다.

 

요즘 개신교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힘든 이유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신뢰할 수 있는 ‘보편적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보편’을 거부하고 ‘개별’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도 있지만, 적어도 개신교 안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과 더불어 ‘공의회 기능 상실’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과학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 즉 보편성을 확보한 것을 신뢰하면서, 왜 유독 신앙에 대해서는 ‘보편성’을 묻지 않는지, 참 아이러니하다. 그만큼 우리는 ‘믿음’이라는 용어를 오해하고 있으며, 신학 또는 신앙의 보편성을 따질 만큼 지성이 없으며, 보편성을 따지는 것을 귀찮아 하는 ‘게으른 신앙’에 빠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결국 잠언서의 지혜가 맞는 것 같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할 개신교인들이 누구보다 게으르게 살고 있다. 그래서 망하고 있다.

그런데 너 게으른 자야, 언제까지 잠만 자겠느냐? 언제 잠에서 깨어 일어나겠느냐? “조금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더 일손을 쉬어야지!” 하겠느냐? 그러면 가난이 부랑배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거지처럼 달려든다. (잠언 6:9-11/공동번역 개정판)

-미국 세화교회 장준식목사 휏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