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리민수목사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롬11:11-24)

새벽지기1 2019. 4. 11. 10:38

9

10

11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본심

왜 이스라엘을 유기하셨는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바울의 고통과 근심(1-3)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4-13)

하나님의 주권(예정)(11-13)

하나님이 주권(토기장이 비유)

(14-24)

하나님의 주권과 이방인(25-29)

행위로 의를 구했기 때문!

(9:30-33)

그리스도를 거부했기 때문!

(10:1-15)

선지자들을 거부했기 때문!

(16-21)

이스라엘의 남은자의 구원(1-10)

이방인의 구원과 자만경고(11-24)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14)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약속(25-32)

이스라엘 유기의 기간: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25)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의(의의 변론)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1:11-24 이방인의 구원 및 자만 경고)

 

본문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해석과 설명


11-24절은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이 완악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척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해서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부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돌 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이 결코 교만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할 때 참 감람나무 가지들을 토끼로 찍으신 하나님께서 접붙임 뒨 돌 감람나무 가지들도 찍으실 것이라는 경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여기서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7-10절의 논리를 이어 받아 한층 더 내용을 심화시키기 위해 사용된 바울의 특징적 표현법이며,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는 앞에서 밝힌 대로 이스라엘이 완악하게 된 것은 틀림없지만 절대적으로 유기된 것은 아니라는 의미가 담긴 어법이다. 즉 본문은 이스라엘의 실족에는 하나님의 섭리적 목적이 숨어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 전파의 기회로 활용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럴 수 없느니라는 강한 부정의 의미로 즉 이스라엘이 실족하긴 했어도 다시 회복 될 수 없는 결정적인 타락에 빠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그들 중에도 남은 자가 이미 선택되었고 장차 종말의 때에 구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

여기서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결과를 보여준다. 즉 이스라엘이 배척한 복음의 물결은 이방인에게로 넘쳐흘렀다. 우리는 그 사실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초대 교회의 역사는 유대인의 박해로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각 지방으로 나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음을 말한다. 한편 ‘’는 이스라엘이 다시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되는 자극을 뜻한다. 즉 전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들이 구원으로 인해 유대인이 질투하게 되며 이러한 자극을 받음으로 구원을 얻게 됨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방인의 넘어짐으로 통해 이방인은 물론 다시 유대인들에게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열리는 신비로운 구원 섭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12)

그들(유대인)의 넘어짐이 세상(이방인)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유대인)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본 절은 전형적인 히브리적 평행법으로 세상이방인, 그리고 넘어짐실패가 대구를 이룬다. 이 두 병행구조는 11절의 내용을 보충하여 표현하면서 동시에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세상의 풍성함이란 복음을 들어 구원의 풍성한 은혜를 얻으며 궁극적으로는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바울의 강조점은 이스라엘의 실족함의 목적도 궁극적으로는 이방인까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익이요 은혜라는 사실에 있다.

하물며 그들(유대인)의 충만함이리요

여기서 그들이 충만함이란 궁극적으로 종말에 완성될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리킨다. 한편 하물며 ~이리요는 그렇게 됨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뜻으로, 본문의 전체적인 뜻은 이스라엘의 연약함이 이방인의 구원에 크게 기여했듯이, 이방인의 충만함을 통해 결국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참조: 11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이는 이 서신의 수신인인 로마 교회 교인들 가운데 이방인으로 복음을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를 하겠다는 문장 전환어구다.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바울은 우선 자신에게 부여된 사도직분에 대한 신적 권위를 밝히고 있다. 즉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것에 대하여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14)

본 절은 종말의 때에 이스라엘의 민족적 구원을 의미하기 보다는 현재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가운에 이방인의 구원을 보고 돌아 올 것을 바라는 바울의 기대가 담긴 말이다. 한편 본절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바울의 사역 방향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이는 후반절에 나오는 유대인의 구원이 갖는 중요성을 언급하게에 앞서 유대인이 일단 구원의 대열에서 이탈된 것이 이방인의 구원에 있어 크게 기여했음을 밝힌 것이다. 한편 여기서 버리는 것이란 표현은 앞선 문맥(11절 이하)이스라엘이 유기 당한 것은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언급한 것을 볼 때 하나님에 의한 거절됨’, 신적 유기란 의미.(머레이) 또한 세상의 화목이스라엘의 버림과 대조적인 표현으로 복음을 통해 이방 세상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화목(헬 카탈라게)’은 인간의 죄인 됨으로 의로우신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가 중보자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 값으로 관계가 회복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여기서 받아들이는 것은 앞의 버리는 것과 대조적으로 사용된 표현으로 종말에 이스라엘의 구원 받은 수가 충만해지는 것을 가리킨다.(12, 25, 26). 그러나 그 결과로서 이어 나오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의 의미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 이후에 있을 성도들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이 영적인 죽음에서 해방되는 구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

'제사하는 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가 거룩한즉 도 그러하니라'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드리던 거제(擧祭)의 규례를 나타낸 것으로서 처음 익은 곡식 가루의 떡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규정한 민15:17-21의 내용이 간접 인용 된 것이다. 즉 여기서 처음 익은 곡식 가루란 추수 후 제사장에게로 가져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드리는 요제의 곡식 한 단을 가리킨다. 이처럼 첫 곡식을 하나님께 바치면 첫 곡식이 거룩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나머지 곡식들도 거룩한 것으로 인정받게 된다. 한편 본절에서의 이 표현은 본절에 나오는 뿌리가지의 비유나 이어지는 17절 이하의 참감람나무돌감람나무의 비유를 고려했을 때 이스라엘의 조상들, 특히 족장들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즉 여기서 떡덩이혹은 가지는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조상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족속, 특히 회심했거나 장차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유대인 가운데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 한편 본절에 나타나는 비유들의 핵심은 거룩함에 있으며 현재는 이스라엘이 그 거룩함의 본질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의 조상들의 거룩함과 같이 그들 역시 언젠가는 거룩하게 될 날이 올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돌감람나무는 인위적으로 재배하는 참감람나무와 달리 돌보는 사람이 없는 야생의 갈람나무로서 그 열매로 기름을 짤 수 있으나 그 양이 지극히 미약하여 경제성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은 비유로 사용된 것으로서 이방인 성도들을 가리킨다. 이 비유는 현대의 농업지식과 배치되는 면이 있다. 사실 접붙임이란 나쁜 나무에 좋은 가지를 봍이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이 활동하던 1세기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감람나무가 소출이 적어질 때 돌감람나무의 가지를 접붙여 나무에 생기를 불어 넣는 농법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농법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접붙이는 방식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법칙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오히려 자연 법칙을 거스려 말함으로써 이방인들이 교회에 입참하게 된 것이 보통 일이 아닌 특수한 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즉 구원의 은혜가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므로 접붙이는 원리 역시 일반적인 상황과는 다르게 묘사된 것이다.(빈센트,톰슨).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참감람나무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으로서 구약성경에서 이미 일반적으로 사용된 표현이다. 한편 본절의 참감람나무 뿌리16절의 처음 익은 곡식뿌리에 연결되는 개념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의 족장을 가리킨다. 바울이 이 비유를 하는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가지가 잘이어 나가기는 했지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참 감람나무 뿌리가 여전히 살아있음으로, 즉 하나님과의 언약이 여전히 유효하므로 이러한 언약에 접붙여진 돌감람나무의 가지인 이방인들도 진액을 공급받아서 영적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빈센트)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구원의 길에서 벗어난 유대인들을 향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방인들이 교만해서 안 되는 이유는 첫째, 어떤 의미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잘려진 가지’, 즉 참감나무인 믿음의 조상들의 신앙에 접붙임 받았기 때문이며, 둘째, 접붙이기 방법이 일반적인 틀인 나쁜 나무에 좋은 가지를 접붙이는 방식과는 반대로 좋은 나무에 나쁜 가지를 접붙이는 방식을 초월한 방법으로 입양되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아마 바울의 이러한 교훈은 본서의 일차 수신자인 로마교회 내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못 박은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이 표현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구원의 기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관계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데니)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19)

여기서 는 모두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뿌리와 자신들을 비교할 수는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나 잘이어 나간 가지들, 즉 구원의 대열에서 멀어진 유대인들과 자신들을 비요하면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음을 간파한 바울은 그들의 그릇된 자긍심을 경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린 가지나 접붙임을 받은 가지나 두 가지들의 비교는 가지들 자신에 의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접붙이는 과정에서 농부(하나님)이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20)

여기서 옳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로스충분히 옳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유대인들이 복음 거부로 인해 이방인들도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본래 하나님의 의도하신 구속사의 전개 과정임을 강하게 긍정하는 것이다. 한편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구원은 오로지 믿음에 의한 것’(2:8-9)이므로 비록 유대인들이라고 해도 불신앙으로 인해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방인들이라도 불신앙으로 살면 언제나 도태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는 이방인들을 경고하는 말로 믿음은 본질적으로 교만과 자랑을 배제하며 경건한 두려움과 떨림을 수반해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21)

본 절에는 앞 절에서 밝힌 이방인 신자들이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제시되고 있다. 한편 바울의 논리의 핵심은 개인적 신앙과 불신앙으로 인한 구원과 유기를 말할 뿐 집단적인 구원과 유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가지치기접붙임이라는 농업 용어를 사용하여 유대인의 유기와 이방인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이중적인 사역을 비유하던 바울은 이제 명확한 신학적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방인들에게 각성을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인자(헬 크로스토테스)’ 2:4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반면 준엄(헬 아포토미아)’ 신약성경에 본 절에만 유일하게 나오는데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에 대한 혹독함’ ‘엄정함을 뜻한다. 즉 이 표현은 바울이 지금까지 언급한 유대인들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유기와 진노를 포괄적으로 요약하는 단어다.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이는 21절의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나 본 절의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와 같은 위협적이며 강조적 표현들을 하는 이유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교만한 마음을 품음으로써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막고 계속 구원에 머물러 있을 것을 바라는 마음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여기 주의 할 것은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라는 구절이 구원의 확실성을 무시한 것이라거나 이방인 역시 버림받을 때가 온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이방인들로 하여금 더욱 굳건한 신앙을 가짐으로 유대인의 구원에도 기여하는 바가 되기를 강하게 촉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여기서 저희는 유대인을 말한다. 한편 본 절과 24-25절부터 집중적으로 다루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언급에 앞서 하나님의 엄위에 의해 잘린 가지와 같이 된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루고 있다.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믿음으로 이루어 질 수 잇는 유대인의 회복 역시 궁극적으로는 믿음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즉 본문은 이미 잘린바 된 가지를 다시 원 줄기에 접붙이는 것은 절대적은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밝히는 것이다. 현재의 시점으로는 완악하게 된 다수의 유대인들이 있지만 종말의 때에는 많은 무리의 유대인들이 믿음을 통한 구원의 길에 합류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문에는 본성이 모두 헬라어 퓌신이다. 동일한 단어가 두 번 사용되어 (돌감람나무)’에서본성을 거스려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처럼 동일한 단어가 두 번 반복된 것은 바울이 지금까지 언급한 감람나무의 접붙임 방법이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져서 유익을 준다는 과정 자체가 자연의 순리를 벗어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강조하려 함이다.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본 절의 핵심은 얼마나 더에 있다. 무론 실제의 경우에 있어서 그 나무에서 잘라낸 가지를 다시금 그 나무에 접붙이는 방법은 없다. 따라서 바울의 의도는 그러한 실제적 농사 방법에 구애 받는 것이 아리라 논리상 유대인 남은 자의 구원이 더욱 용이하고 정당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에 있다. 이처럼 바울은 궁극적으로는 유대인 역시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서 구원에 합류되는 것이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것이다.

 

교훈과 적용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1)

이는 앞에서 밝힌 대로 이스라엘이 완악하게 된 것은 틀림없지만

절대적으로 유기된 것은 아니라는 강한 부정이다.

이렇듯 이스라엘이 배척한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넘쳐흘렀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적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하여 그들 중 얼마를 구원하려 하심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민족적 구원이 아닌 남은 자를 말한다.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14)

그 방법이 재미있다.

시기나게 하여”(11,14)

이는 이스라엘 가운에 이방인의 구원을 바라는 바울의 기대가 담긴 말이다.

오늘 이방인 된 우리가 주목할 말씀은 18이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이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첫째,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잘려진 가지인 참감나무인 믿음의 조상들의 신앙에 접붙임 받았기 때문이며,

둘째, 초월한 방법으로 입양되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즉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어

그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17)

따라서 우리는 21절의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라는 말씀과

22절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늘 근신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에 견고히 서 있으라는 경고인 것이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11: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