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심하지 말라!
(고후4:7-10)
◆본문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서론
어느 날 다윗 왕이 궁중 세공인에게 자신을 위한 반지를 하나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 반지에는 내가 큰 승리를 거두어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그것을 차분히 다스릴 수 있는 글귀가 새겨져야 하며, 자신이 큰 절망에 빠졌을 때는 용기를 줄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상황에서도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글귀가 새겨진 반지 하나를 만들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세공인은 고민하다가 이런 글귀를 반지에 새겼습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
후에 렌터 윌슨 스미스라는 시인이 이 글귀를 가지고 시를 하나 썼습니다.
<큰 슬픔이 거센 강물처럼 네 삶에 밀려와 마음의 평화를 산산조각 내고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네 눈에서 빼앗아갈 때면 네 가슴에 대고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끝없는 힘든 일들이 네 감사의 노래를 멈추게 하고 기도하기에도 너무 지칠 때면
이 진실의 말로 하여금 네 마음에서 슬픔을 사라지게 하고
힘겨운 하루의 무거운 짐을 벗어나게 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하루하루가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 근심 걱정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의 기쁨에 젖어 안식하지 말고 이 말을 깊이 생각하고 가슴에 품어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인생을 무너뜨릴 것 같은 문제도 분명 지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고통은 현실의 문제이기에 감당하기가 말처럼 그리 쉽지 많은 않지요.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유머(일명 “없다” 시리즈)가 있습니다.
10대 “철”이 없다. 20대 “답”이 없다. 30대 “집”이 없다. 40대 “돈”이 없다.
50대 “일”이 없다. 60대 “낙”이 없다. 70대 “이”가 없다. 80대 “배우자”가 없다.
90대 “시간”이 없다. 100대 “다 필요” 없다.
그 만큼 이 시대가 삶이 고되고 힘들다는 이야기겠지요.
여기에 믿는 사람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 지체 중에도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믿음으로 극복하려고 애쓰는 지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지나 갈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단지 ‘지나가리라’ 하는 말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소망 가운데 속히 다시 일어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고린도 전서는 분열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한 마음 한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10)는 권면이 주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충고와 권면을 수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도 바울의 사도직과 개인적인 신상 문제를 거론하며 거부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다시 펜을 들어 두(세) 번째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 고린도후서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개인적인 변호에 많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난을 무릅쓴 바울 자신의 사역 자세에 대하여 말하면서 성도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고난을 당하게 되더라도 ‘낙심 하지 말고’ 모든 것을 인내하고 승리하도록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또한 지금 우리는 신학기 사역 중에 있습니다.
가지원이 매칭되지 않아 낙심한 지체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래서 오늘 <낙심하지 말라!>는 제목의 메세지를 준비했습니다.
◆본론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에게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보배’는 ‘복음’을 가리키며, ‘질그릇’은 우리 자신을 가리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0-21)“
여기서 질그릇은 깨어지기 쉬운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을 질그릇에 비유한 것은 자신의 육체를 경시하거나 자신을 멸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는 다만 보배와 같이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복음을 깨지기 쉽고 보잘 것 없는 질그릇 같은 인간이 갖게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즉 바울은 복음의 무한한 영광과 자신의 상대적 무가치성을 비교 대조함으로써 복음의 능력이 그것을 전하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한편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는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의 근원이 복음에 있다는 사실과 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복음’을 가진자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기고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능력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죄인을 회개하여 구원하게 하는 능력도 있지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제반 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고 했습니다.
요즘 제 마음이 많이 무겁습니다.
지금쯤 새로운 가지원 매칭 소식이 속속 들려야 하는데 예년 같지 않아 그렇습니다.
내 마음이 좋지 않다는 것은 가지원이 매칭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 지체들이 그토록 애쓰고 있는데 열매가 없어 낙심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화요일 두 가지 일로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는 아주대 국기게양 기도회입니다.
그 날은 원래 한세대 국기게양대 기도회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한세대에서 기도회를 마치고 막 예림자매개 사온 다과를 나눌 무렵 경기대 선아자매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어디냐고 물었더니 솔빈이 하고 아주대 국기게양대 기도회 하려고 아주대에 있는데 국기게양대가 어디 있는지 묻기 위해 전화를 한 것입니다.
나는 즉시 아주대로 갔고, 국기게양대 앞에는 ‘미세먼지 마스크’를 두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선아자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아! 어떻게 아주대 국기게양기도회를 하려고 마음먹었어?”
그랬더니 선아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지난 해 캠퍼스에 혼자 있다 보니 많이 외로웠었어요.
그래서 솔빈이도 그렇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제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수여대 슬기 자매입니다.
슬기 자매 역시 ‘나홀로 캠퍼스’입니다.
슬기 자매가 그날 가지장 모임에 왔었습니다.
하지만 오자 마지 속된 표현을 완전히 뻗었습니다.
의자에 앉아 기도하는 듯 싶더니 그냥 골아 떨어져 자는 것입니다.
나는 그 이틀간 슬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압니다.
월요일 새벽에 일어나 국기게양대 기도회와 간호과 팀미팅!
그리고 연학하는 일과 수업에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날 슬기는 가지장 모임이 다끝난 뒤에 겨우 일어나 기숙사로 돌아갔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이면서도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여대를 제외하고는 캠퍼스에서 확실한 회원 가입 소식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결코 사역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낙심할까 그것이 염려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지만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신입생 매칭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번 주 한 주만 가지고 실망하기에는 너무 빠릅니다.
이런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격려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3:13)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여러분! 이 말씀이 정말 여러분에게 격려가 됩니까?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는 가운데 결코 낙심하거나 낙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낙심은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결코 낙심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둘째, 하나님께서 고난을 감당할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8-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 내용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8.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9.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8절에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는 ‘공간적으로 압박을 당하지만 아직은 궁지에 몰린 상태는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 자신이 빠져 나갈 곳이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려있는 상태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셨음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또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에서 ‘답답한 일(헬, 아포루메노이)’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뜻으로 절망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 절은 바울 자신은 연약한 질그릇 같아서 환난을 당하여 절망할 수 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므로 그러한 여건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9절의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는 사람들에게는 박해를 받았지만 하나님께는 버림을 받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는 박해에서 한 단계 더 나가 죽을 고비를 당했지만 역시 하나님께서 구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반 죽을 정도였으나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그 때가 바로 심히 큰 능력으로 우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영화 ‘더 테너’의 실제 모델인 성악가 배재철 교수는 이탈리아 밀라노 베르디국립음악원에서 수학하면서 세계적인 콩쿠르를 석권했습니다. 유럽의 여러 성악 대회에서 우승을 거듭했고, 헝가리의 미슈콜츠 시립극장에서 오페라 주역으로, 또 2003년 일본에서 베르디의 <일트로바토레>를 공연했습니다. 영국에서 <라보엠>을 공연했을 때, 더 타임스는 아시아에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목소리 라고 극찬했습니다. 2005년에는 아시아인에게 좀처럼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독일 자르브뤼켄 극장과 전속계약까지 맺으며 오페라의 신성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활약하던 2005년, 그는 돌연 갑상선암 선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암 적출 수술을 받던 중 성대 신경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오른쪽 폐 기능까지 잃어버렸습니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테너. 이것은 직업적인 사형선고이자 삶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속에 결코 포기하지 마라.는 주의 음성이 소망의 소리로 들렸습니다. 배재철 씨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시 노래할 것을 믿었습니다. 이후 피나는 노력 끝에 2011년 4월 20일 더 페이스 콘서트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배재철 씨는 당당히 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고난과 역경 가운데 낙심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눅18:1-7)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역경이 닥쳤을 때 믿음이나 의지만으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극복할 힘과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0장 13절 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무력감에 빠져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를 고난과 역경에서 능히 건져 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상황을 돌파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셋째, 우리 안에 있는 부활의 소망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성도들도 살면서 심각한 어려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본문 10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그의 모든 환난은 예수의 죽으심에 연합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에 바울 자신이 동참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 혹은 고난이 바울의 경험 안에서 지속적으로 재현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과 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한편,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는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끝없는 죽음의 위협을 당하도로 하신 이유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바울이 압제와 위협에 둘러싸여 있는 가운데에서도 살아남아서 오히려 복음의 능력을 나태냄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 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그것을 감내하는 자에게는 부활을 통한 궁극적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롬8:17)이기 때문입니다.
찰스 코언이라는 곤충학자가 나비의 생태를 관찰했습니다.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오는 과정을 관찰하던 찰스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렇게 작은 구멍으로 힘겹게 나와 나비가 되는구나. 구멍을 넓혀주면 더 쉽게 번데기에서 나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찰스는 나비 고치를 몇 개 구해서 부화의 과정에서 살짝 칼로 입구를 넓혀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나온 나비들이 성장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찰스가 칼집을 내준 나비들은 한 마리도 제대로 날지 못하고 바닥에서 굴러다니다 죽었습니다. 혹시나 싶어 여러 고치를 구해서 서로 대조를 해보았지만 자력으로 빠져나온 나비들만이 제대로 날 수 있었고, 칼집을 내어준 나비들은 항상 결과가 똑같았습니다. 고치를 빠져 나오려는 나비의 몸부림 과정에서 윤활유가 나오게 되고 이것이 날개를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데, 찰스가 칼집을 내준 나비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환난이 주는 많은 유익과 소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환난 때문에 겪는 고통과 어려움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환난을 통해 주시는 귀한 유익도 기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고 했습니다.
또 로마서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가져야 할 것은 믿음에 더하여 ‘믿음의 인내’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롬8:18)기 때문입니다.
◆결론
어느 거리에서 상점을 운영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꿈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점에 불이 나서 상점이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 주인의 인생이 끝장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화재 다음날 사람들은 상점 앞에 붙은 안내의 글을 보고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이 상점의 모든 것이 다 타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소망은 결코 타지 않았습니다.
내일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 믿는 성도의 부활신앙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바울은 고전15:57에서 부활신앙의 승리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리고 58절에서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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