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6)

새벽지기1 2018. 1. 17. 07:20

 

1.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는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롬6:10-11)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세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 의식에서 물 속에 담갔다가 다시 들어올리는 것은 이를 의미한다.

 

(롬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의식이 전혀 없다면, 그는 교인은 될지언정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말씀을 통해서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처럼 악세살이 걸치듯 걸치는 악세사리 종교가 아니다.

죽음과 생명이 교차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교회는, 죄의 회개와 경건생활과 상관 없이, 단지 복을 구하고 위로와 격려를 받는 곳이 아니다.

 

우리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

옛사람인 나도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죄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산 존재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이제는 죽었다가 살아난, 새 생명으로, 새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할 때 이 체험을 하게 된다.

확실한 체험이 없다면 자나깨나 이 은혜를 구하라.

체험이 있었더라도 지금 희미하고 영적으로 침체되고 실감이 안 난다면 새롭게 하라.

우리 인생의 성패가 죄에 대해서는 죽고 새 생명으로 사는 데에 달려 있다.

돈 좀 더 벌고, 재산을 늘리고, 좋은 환경에서 살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에 달려있지 않다.

 

그런 것들은 죽는 순간 한 줌의 재로 날아갈 것들이다.

우리는 한 평생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대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 계산을 해야 한다.

불 속에서 간신히 구원받은 사람이 되지 않을려면 죽음과 영생을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확실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죽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육체가 죽어 영혼이 빠져 나오는 것을 반갑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옥에서 온 마귀이다.

그 마귀는 그 영혼을 영원한 형벌의 지옥으로 데려가서 영원토록 그 영혼을 괴롭힐 것이다.

 

루이스 베일리는 그의 저서, <경건>에서 지옥을 이렇게 묘사한다.

지옥에는 징벌, 비참함, 슬픔, 고통만 있을 뿐 동정, 긍휼, 위로, 구원 같은 것은 없다. 지옥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이 항상 꺼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노가 죄인들의 영혼과 육체에 쏟아부어지고, 유황과 불이 끊임없이 고통을 가져다준다. 불꽃은 영원히 타오르고 결코 꺼지지 않으며, 죄인은 죽어갈 뿐 결코 완전히 죽지는 않는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 부르짖지만 그 고통을 결코 없앨 수 없고, 언제 그것이 끝날지도 알지 못한다. 땅 위의 잔디나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날들 동안, 즉 수천 수만 년 동안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조금도 끝날 기색이 없다. 처음 지옥에 던져진 날과 똑같은 고통이 영원히 지속될 뿐이다.

 

교회에 다니는 동안,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구원을 확실히 하고 믿음생활을 확실히 해야 한다.

초대 교회 시대와 종교개혁과 청교도들의 시대에는 교회가 이것을 강조하고 확실히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다 천국 백성이 된 것처럼 호도하고 세상에서 잘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세상 영광을 보여 주고 절만 하면 다 주겠노라 하면 서로 절하느라 머릿통들이 깨질 것이다.

사도와 선지자들이 목숨 걸고 전했던 복음과 진리들에 더 이상 생명을 걸지 않는다.

세상의 초등학문과 사람의 전통들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들이 교회들을 사로 잡고 있다.

 

(골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2.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진리의 기둥과 터이어야 할 교회가 왜 타락하느냐?

땅의 것을 생각하고 찾고 구하기 때문이다.

이미 죽었어야 하는 땅의 지체를 위하고 살릴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말아야 하는데(빌3:3)

육신으로 봉사하고 땅 위의 것으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고 있다.

땅에 있는 지체를 뭐라고 하는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죽여야 할 음란과 부정과 사욕을 살리느라 좇아가느라 세상과 경쟁을 하고 있다.

죽여야 할 악한 정욕과 탐심을 위해 시간과 정력과 생명까지도 걸고 있다.

탐심은 우상숭배인 것을 알아야 한다.

 

탐심은 야망을 이룰 것 같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어 목이 부러지고 만다.

급히 세상의 것을 이룰려고 하는 탐심이 나와 가정과 사회를 어지럽히고 살육과 전쟁을 낳는다.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믿음의 신학은

탐심을 가르치고 우상숭배를 유도할 뿐이다.

이것은 4차원의 영성신학이 아니라 전적으로 땅의 신학이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진리로 성결한 삶을 살면서, 잠잠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속에 있는 탐심과 방탕(악한 정욕)을 처리하지 못하면 바리새인의 외식이 되고 만다.

세상의 바벨탑을 쌓다가 지옥으로 곤두박질하는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이 사는 길이라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은 죽는 길이라고 하는 것들이다.

진리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세상을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만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이고, 부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파멸에 떨어지고 만다.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땅의 지체를 죽이지 못하고 그것을 살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되는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이미 임한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고 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않는 한, 그의 인생은 피어날 수가 없다.

공의로운 하나님이 인생을 굽어 살피시고 그 마음과 생각을 다 아신다.

행한 대로 갚으시고,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법도가 세상과 하늘을 다스린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의 인생에서 떠나갈 수가 없다.

성령을 위해서 심는 사람으로 인생의 목적이 바뀌어야 복과 영광을 거둘 수가 있다.

 

땅의 것을 생각하고 찾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않다가 멸망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이었다.

신약에 와서 이러한 사람들을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한다.

 

(빌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3.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

 

땅의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말씀이다.

이에 대한 간증들이 있어야 한다 .

(골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았다면,

우리의 생명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져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새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사람답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곳,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

 

그러면 이 땅에서 구하는 것,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들을 더해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의 모든 쓸 것들을 영광 가운데 풍성하게 채워주신다고 하셨다. 체험하라.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의 것을 구하다가 하늘을 잃고 하나님을 잃고 지옥을 얻고 만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인 것을 알고 위의 것을 먼저 찾을 때 하나님은 더해 주신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내 가진 시간과 재물과 열정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오직 내 나라와 나의 의를 위해 쓰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아무 소망이 없다.

내 가진 것을 현재 무엇을 위해 쓰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마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맞이하게 될 영생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고 했다.

루이스 베일리는 영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거듭난 신자가 죽는 순간,

하늘나라에 이를 길 중간에서 사랑과 애정으로 그를 맞이하신다(빌3:20,골3:2).

죽음은 신자에게서 낯선 것도 아니고, 두려운 것도 아니다.

이미 신자는 날마다 (죄에 대해) 죽는 경험을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을 알기 때문이다(골3:3).


신자에게 죽음이란 이 세상의 모든 수고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집, 곧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안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천사들을 비롯해 거듭난 장자들, 재판관이신 하나님, 완전케 된 영혼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된다.

 

영생은 복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나라에 올라가 천사들과 함께 거하며 부족함 없는 즐거움과 기쁨을 영원토록 누린다.

따라서 바울처럼 영원한 기쁨을 맛본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과 부귀를 배설물로 여겼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신실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금식하고,

헌금하고, 죄를 애통해하고, 선한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에게 나눠주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을 상인에, 영생을 값진 진주에 비유하셨다.

그리고 지혜로운 상인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산다고 말씀하셨다(마13장).

 

영생이야말로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행복이다.

하늘나라에는 결코 늙지 않는 영원한 젊음과 쇠하지 않는 아름다움, 다함이 없는 사랑과

아픔이 없는 건강, 끝이 없는 생명만이 존재한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땅에 있는 것들을 욕심내다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결국에는 영생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 땅에서 회개하며 거룩한 삶으로 천국을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