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4장 후반부는 바울이 밀레노에서의 고별설교로 유명하다.
오늘은 고별설교 전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24절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받을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 바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여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인도하고 있다.
16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한다.
성령 충만한 바울이라고 해서 앞으로 당할 일을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앞 일을 너무 알려고 하다가 우리는 실수를 하고 미혹을 당한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시나”
바울이 예루살렘에 이르는 동안 예언자들을 통해 계속 이 예언을 받았다.
성령이 알게 하신 것이니까 예루살렘을 가지 말아야 한다고들 말렸다.
그러나 바울은 예언된 결박과 환난 때문에 갈 길을 멈추거나 포기한 것이 아니라,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는 데 집중했다.
이 길과 사명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바울은 이미 19장에서도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처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한 바 있다.
바울이 각 성에서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갈려고 한 데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어진다.
그리고 그 예언들을 보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가지 말라는 예언은 아닌 것을 볼 수 있다.
고난이 기다린다고 갈 길을 가지 않고 사명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4장, 루스드라에서 무리들이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친 적이 있다.
이때에도 바울은 말한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고난과 환난이 두려우면 믿음 생활은 할 수가 없다.
광야 훈련이 없으면, 가나안 기업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의 시련을 기뻐하라고 하는 것은 그 시련의 인내를 통해 우리가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 중 오래참음은 고난에 대한 오래 참음(long suffering)을 말한다.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한다.
그들이 고난 속에서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것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모세는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5-26).
바울은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데도, 달려갈 길과 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믿음의 자세는 바울에게 일상이었다.
디모데후서에서 이제 그의 생애의 종말이 가까웠을 때 하는 고백을 본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4:6-8)
바울에게만 달려갈 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의 달려갈 길이 있는 것이다.
믿음은 항상 길과 경주로 비유되곤 한다.
(히12:1-2)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경주를 잘 하려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인내로써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그 결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예수님의 신성은 영원전부터 보좌 우편이시지만 그분의 인성은 십자가를 통하여 앉으셨다.
우리도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아야 한다.
이기는 자에게 보좌 우편에 함께 앉게 하여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데 있어서 그 경주하는 자의 자세를 바울은 말한다.
(고전9:24-27)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믿음의 길이 경주인 것을 알고, 메달을 향해 피땀흘리며 준비하는 선수들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위해 절제하고 달려가지만 우리는 의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달려간다.
달음질 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허공을 치지 않아야 한다.
정확한 목표와 약속을 바라보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빌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도 믿음의 길을 게으르지 아니하고 절제하면서 달려가야 할 것이다.
이 일을 위해 바울은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노라고 하였다.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과 의의 면류관을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가 되자.
바울은 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사명은 주 예수께 받은 것이고,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과 구원은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육신을 입고 보내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게 하시는 데에서 그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의의 공로를 값없는 은혜로 우리에게 거저 주셔서 믿음으로 받게 하셨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행위로 이루는 언약을 감당하지 못하여 범죄하였기에,
하나님은 은혜로 이루는 언약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실행에 옮기시고 적용하여 주셨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은혜로 주시기 위해 삼위 하나님이 협력하셔야 했다.
바울은 구원의 이 은혜성을 이렇게 말한다.
(롬4:6-8)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일한 것이 없이 없는데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복이 은혜의 복이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복,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의 복,
그 복이 바로 은혜이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엡2:6-9)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믿음도 우리의 의지의 작용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우리가 알고 감사해야 한다.
구원은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영역에서 은혜의 영역으로 옮겨진 것이다.
구원받은 자는 이 하나님의 은혜가 왕노릇하는 가운데 성화를 거쳐 영생과 영화에 이르게 된다.
(롬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다 이루시고 거져 주시는 이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과 은혜의 왕노릇이
우리 구원 받은 자들의 생애와 영생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그 영광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를 고난 속에서 연단하시는 것이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죽는 것이 믿음의 길이고 사명의 길이다.
(눅9:23-24)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
사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살 사명이 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데도, 은혜의 복음을 사는 데도,
십자가를 지고, 생명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교훈이다.
믿음(긍정)의 말만 하면, 형통하게 된다는 값싼 이단 복음에 넘어가 영혼을 망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은혜의 복음을 말하면서, 고난의 연단을 면제하거나 탐욕의 복을 보장한 적이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성결한 삶을 살고,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살아야 한다.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성품과 삶을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믿음의 길을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믿음의 길을 달려가지 않으니, 우리는 은혜의 복음을 성품과 삶 속에서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회개치 않음과 게으름을 보다 못해 하나님은 사랑의 징계를 내리시고 돌이키게 하신다.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이 고난을 회피하고 세상 방법으로 해결할려고 하면 할수록 그 고난은 깊어지기만 한다.
고난이 오면 나를 돌아보고 죄의 회개부터 하고 인내하고 연단을 이루는 것이 은혜이다.
은혜의 목적지와 상급을 알았으면,
믿음의 경주를 잘 달려가고 은혜의 복음을 사는데 생명을 걸어야 한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도 주의 은혜에서 우리를 끊지 못한다.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는다 해도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주의 은혜로 우리는 넉넉히 이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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