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어거스틴

[어거스틴 참회록154] 모든 사람은 행복을 원한다

새벽지기1 2017. 9. 15. 09:52



제10 권 고백




21. 모든 사람은 행복을 원한다.


영생 복락은 내가 본 카르타고를 기억하는 것 같은 종류가 아닙니다.
그것은 물체가 아니므로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수를 헤아리는 식으로 기억 속에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수를 지식 속에 소유하는 자는
그 이상으로 한층 더 자기 것으로 하겠다는 따위의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우리는 영생 복락을 지식 속에 가지고 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영생 복락을 누리기 위해 한층 더 그것을 내것으로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변론술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기억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분명히 변론술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아직 변론에 능통하지 못한 사람들도
그 이름에 의해서 표시돠어 있는'것 자체'를 생각해 내고
많은 사람들은 변론에 능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들의 지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체의 감각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변론에 능통해 있는 것을 인정하고 기뻐하며 자기도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내적인 지식에 의한 것이며
기뻐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영생 복락을신체의 감각에 의해서
타인 속에서 경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쁨을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속에 포함 되어 있을까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사실 나는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비참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영생 복락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나의 기쁨을 신체의 감각에 의해서 보거나 들은 것도 아니며
냄새를 맡은 것도 만져 본 것도 아닙니다.
단지 기쁠 때 마음 속에서 경험한 것이고 그 지식이 기억에 들어왔기 때문에
지금 기 기쁨을 기뻐했다고 기억하는 대상의 종류에 따라 때로는
경멸을 가지고 또는 동경하면서 회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나는 그전에 추악한 것에 대해 특별한 기쁨을 느꼈던 일이 있습니다만
지금 생각하면 혐오스럽고 끔찍하기만 합니다.
어떤 때는 선하고 훌륭한 것에 대해 만족할 만큼 커다란 기쁨을 느꼈습니다만
지금은 그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슬퍼하면서 지나간 기쁨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떤 느낌을 주는 영생 복락을 경험했기에
그것을 기억하고 좋아하며 동경하는 것입니까?
나의 이웃 뿐만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원하며
우리가 가기에 대해 확고 부동한 지식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굳은 결의로써 갈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가 두 사람에게 군대에 나가 근무하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한 사람은 원한다고 하고 한 사람은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두 사람에게 행복해지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즉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군복무를 원하는 사람이든 원하지 않는 사람이든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여기에서 저 사람은 다른 곳에서 각각 기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기뻐하기를 원하느냐는 물음에 똑같은 대답을 하는 것과 같이
똑같이 복된 삶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기쁨을 복된 삶이라고 부릅니다.
한 사람은 여기서, 다른 한 사람은 다른 곳에서 찾으나
그들이 구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이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생 복락이라는 말이 울려 나올 때
그 기억 속에 이미 있었으므로 이를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