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안식에 들어가려면 (히 4:10-16)

새벽지기1 2017. 9. 12. 06:37

 

우리 믿음 생활의 목적은 안식에 있다.

이 안식은 이 땅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천국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누린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안식은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에게 허락되는 것이다.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셨다.

 

주님의 뜻과 일에 게으른 자는 이 안식을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얻을 수 없다.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 일을 쉬고 안식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안식을 얻을려면 우리는 네 가지를 해야 한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한다.

 

1.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본에 빠지지 말라

 

(히3:12-14)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나올 때 장정의 숫자가 60만3천이었는데,

가나안 안식에 들어간 자는 겨우 세 사람,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다.

나머지는 다 광야에 엎드려졌다. 다 시체가 되어 묻혔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다.

 

(히4:2)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믿음은 입술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시련 가운데서 행위로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히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들은 왜 약속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는가?

(히3:15-19)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안식에 못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완고하여 하나님을 격노케 하던 자들이었다.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이었다.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이로 보건데 그들은 믿지 않음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믿음은 곧 순종이다.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롬16:26)

순종이 없는 믿음은 처음부터 잘못된 믿음이다.

 

내가 만든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주신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성령에 의해 영적이고도 초자연적인 빛으로 우리 마음에 비친 믿음이 있으면,

넘어짐은 있더라도 완고함까지는, 불순종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고,

그 믿음으로, 힘쓰고 애씀으로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안식과 기업에 대한 약속은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함으로, 믿음과 인내로 얻는 것이다.

(히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2.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엄위함을 알라

 

안식에 들어가고 못들어가고의 심판은 무엇으로 하는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한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속일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혼과 영 사이를 쪼개고, 관절과 골수 사이를 쪼갠다.

찔러 쪼갤 수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

우리는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우리 마음과 생각에 품었던 것을 다 기록하고 계신다.

그것이 믿음의 순종이었는지 불순종의 완고함이었는지 판단해 내신다.

 

그러므로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난다.

그대로 심판하실 것 같으면 그 분 앞에, 그분의 말씀 앞에 남아날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말씀에 의한 심판이 있기 전에,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는 수시로 살아있고 활력이 있는 말씀 앞에 서야 한다.

그 말씀으로 우리의 내면을 드려다 보고 우리의 행위를 달아보아야 한다.

 

믿음의 선진들은 말씀의 능력과 엄위함을 알았기에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고 그 앞에 엎드렸다.

그 말씀으로 속에 깊이 숨어 있는 교만과 정욕과 죄들을 찾아 쪼개고 겸손해졌다.

그 살아 있고 활력있는 말씀으로 그들의 일상의 삶과 행위를 통제하고

그 말씀의 약속을 살아있고 활력있는 말씀으로 붙들고 위로와 소망을 삼았다.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불씨를 다시 살리면 그렇게 할 수 있다.

 

3.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힘입으라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엄위하신 말씀 외에, 큰 대제사장이 계신다.

(히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믿는 도리는 신앙 고백이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 신경의 신앙 고백을 굳게 잡아야 한다.

사도 신경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 고백이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되었고,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아버지께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이다.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그분이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시다.

구약의 대제사장들보더 훨씬 크고 위대하신 대제사장이시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죽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계속 필요하였다.

그들은 죄가 있기 때문에 자기들을 위해서도 속죄의 제물이 필요하였다.

또 백성들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속죄의 많은 제물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하신 대제사장이시다.

아론의 계열이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분은 죄가 없으시니 자기를 위한 제물이 필요 없다.

많은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많은 제물이 필요 없다.

그 자신의 몸을 단번에 영원히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는 도리, 신앙 고백은 이분에 대한 신앙 고백이다.

신앙 고백을 했으면 그 내용을 붙들고 그 내용대로 사는 순종을 나타내야 한다.

그것이 살아 있는 믿음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우리에게 있는 이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시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엄위하신 말씀의 심판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변호해 주실 분은 이 대제사장이시다.

이 대제사장은 이 땅에서는 우리 죄의 모든 형벌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셨다.

우리를 위해 죽음을 맛보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변호하고 계신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신다.

(히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우리가 믿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일상의 삶과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우리 마음에 생각하는 것을 따라 우리가 살거든요.

 

오직 세상과 일만 깊이 생각하면, 우리의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만 살게 될 것이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고 그분을 본받아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릴려고 할 것이다.

 

그분의 형상을 닮고자 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깨닫고 회개하고자 할 것이다.

그분이 이 일을 위해 보좌 우편에서 간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면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될 것이고, 다시 한번 결단하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길로 달려갈 것이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나의 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될 것이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우리의 안목과 정욕과 이생을 온통 차지하지 않게 할 것이다.

 

더 이상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않고,

내 탐욕의 배 우상을 내려놓고 멸망의 길에서 벗어날 것이다.

세상이 나에 대하여 내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는 길로 나아갈 것이다.

 

이 십자가의 길 끝에 안식과 형통이 시작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을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는 자에게 복의 약속이 있다.

세상과 재물을 바라고 세상의 도를 지키는 자에게는 저주와 재앙의 약속이 있다.

 

4.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

 

우리는 연약하고 넘어지기를 잘 한다.

우리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우리 믿음만으로는 대적들 앞에서 이기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육체와 세상과 마귀의 대적을 이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를 힘입을 때이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수시로 나아가야 한다.

성령으로 기도하며, 수시로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 기도해야 한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왜, 우리가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받아주시는 것이다.

 

(히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면

긍휼하심과 은혜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이 두 선물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으면 우리는 말씀에 의한 심판을 견딜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엄위하신 심판대도 여셨지만 동시에 은혜의 보좌도 설치하셨다.

이 보좌는 은혜가 자유와 능력과 관대함으로 다스리며 작용하는 보좌이다.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면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는 것이다.'

자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 받는 것이며

은혜는 우리의 영혼을 순결하게 해 주는 것이다.

 

자비를 구하기 위하여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는 실로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존경과 경외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는 곳이며 은혜로 다스려지는 곳이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휘장을 찢고 열어주신 새롭고 살 길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음을,

말씀을 통해 믿고, 성령으로 체험해야 한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수시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