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 5:18-21)

새벽지기1 2017. 9. 19. 07:04

 

오늘은 가정주일로 지키고자 한다.

가정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일도 좋고, 성취도 좋고, 재물도 중요하지만,

가정이 즐거운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들이 다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잘 나가더라도,

가정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들은 다 모래 위에 지은 성과도 같다.

경제 대국이 된들, 이혼율이 높고 자녀들이 방치된다면, 그 나라는 불행한 대국이다.

 

돈보다 일보다, 가정이 우선이고, 가정이 만사의 기초라는, 인식부터 확고히 해야 한다.

가정이 깨지면, 돈도 일도 무너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돈만 있으면 일만 있으면 될 거 같지만, 가정이 무너지면, 얼마후 인간들이 무너진다.

 

이혼한 사람들은 대체로 그 이혼을 후회한다고 나중에 말들을 하고 있다.

이혼으로 인해,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과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자녀들의 성품과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고, 그들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다.

사회 불안과 범죄율이 높아지게 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면 된다.

 

부부는 돕는 배필로 만난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말아야 한다.

(배필; 혼자로는 부족하고 외로우니까 서로 도우라고)

(마19:04-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가정도 결국은 사회와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이다.

기본이 되는 것이 부부관계이고, 다음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잘 돼야 자녀와의 관계도 잘 될 수 있다. 자녀도 잘 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이 두 축의 관계가 원만하여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세상의 방법이나 사람의 지혜로는 결코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리로 살 때만 가정은 행복한 안식처가 될 수 있다.

세상은 해결할 수 없는 방법과 지혜로 할려고 하니까 점점 더 악화되기만 할 뿐이다.

(이혼률과 가정파괴의 증가, 결혼과 출산의 기피)

하나님의 방법이 뭐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이고 권고이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래야 하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그래야 한다.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의 관계가 그래야 한다.

 

어떻게 피차 복종하는가?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함으로’이다. 주께 하듯 복종하라고 하신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함으로’ 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함으로’이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하신다.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주신다고 하신다.

‘부모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음으로’ 이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신다. (성질대로 감정대로 하지 말고)

 

이것이 하나님이 명하는 질서이고 방법이다.

어떤 관계에도 ‘주께 하듯’, ‘그리스도가 자신을 주심같이’ ‘주 안에서’, ‘주의 교훈과 훈계로’이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서도 이 관계들에는 상하의 질서가 있다.

부부간에는 피차 복종하는 관계이지만, 거기엔 질서가 있어야 한다.

‘남편들아 아내에게 복종하라’는 없다.

‘부모들아 자녀에게 순종하라’는 없다.

 

조심할 것은, 내 의무는 하지 않은 채 상대방의 의무를 내 권리인양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명령대로 자기 의무를 다해서 피차 복종하는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부부관계가 깨지거나 불편하고, 부모와 자녀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피차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가 불편한 것도 피차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복종하는 관계가 되지 않고는 인간 관계에, 가정에, 평화는 없다.

서로 복종하는 관계로 살 때, 하나님은 축복하실 것이고, 관계는 부드러워지고 행복해질 것이다.

그런데 왜 이 피차 복종하는 관계가 되지 않느냐?

 

원수 때문에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중심에 없기 때문이다. 명심하시라.

각 관계 사이에, 중심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없다면 관계의 균형은 깨지게 된다.

서로 자기 주장만을 앞세우게 되고, 돈이 힘이 정의가 되고, 그 결과 원수 관계로 끝나고 만다.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세상은 선진국일수록 왜 이혼율이 높고 부모와 자녀관계가 엉망인가?

그 관계들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없기 때문이다.

교인들도 왜 세상을 그대로 닮아가는가?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없기 때문이다.

 

왜, 세상도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가정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없는가?

그것은 육체의 충만함으로 살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

 

오직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지 않고, 술 취하고 방탕함으로 살기 때문에 관계가 깨진다.

술 취하고 방탕함으로 살지 않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 때

그리스도를 경외함도, 피차 복종하는 관계도 해결될 수 있다는 답을 주는 말씀이다.

 

나는 술도 안 먹고 방탕하지도 않는데요? 할 수 있다.

그러나 술 취함은 우리가 성령으로 살지 않고 육체로 사는 것의 대표적인 표현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성령으로 살지 않으면, 육체로 살게 돼 있다.

 

육체로 사는 것과 성령으로 사는 것은 항상 서로 거역하고 거스리는 관계이다.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사랑, 행복)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술에 취하면 방탕의 결과를 가져오듯이, 육체로 충만해지면 무질서와 관계의 파탄을 가져온다.

술 취한 사람은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내세울 뿐이다.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고 자기를 굉장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육체로 충만한 사람도 항상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 의견만 내세운다.

다른 사람에 관해서는 생각하지도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좋은 얘기를 해줘도 듣지 않는다.

내 감정, 내 생각, 내 결론이 최고이다.

육체로 충만해지는 것은 술에 취한 것과 같다.

 

자기 중심은 병이다. 언제나 상대방과 충돌한다. 결국 이것은 또 다른 고통으로 연결된다.

사람들은 점점 그에게서 멀어져 간다.

불행하게도 결국은 그도 외로워지고 자포자기하게 되고, 우울증에 이르게 된다.

사람은 그렇게 관계없이 고독을 살만큼 강한 존재가 못된다.

 

우리가 피차 복종할려면 술 취하고 방탕한 사람과 전적으로 달라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들어갈 수 있고, 피차 복종할 수 있다.

피차 복종이 안 되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육체로 충만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달라진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5:19-20)

 

성령으로 충만하면, 인간관계도 달라진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게 된다.

관계가 부드러워지고 사랑스럽게 되고 행복해진다.

“지혜 있는 자같이” 행하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게 된다.

 

지혜로운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뛰기 전에 살피고 말하기 전에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혜있는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자기 의견만 내세우지 않는다.

주의 뜻을 묻게 되고, 그 뜻에 순종하고자 한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위로부터 쏟아부어지는 성령 세례를 꼭 받아야만 할까요?

그렇지 않다.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다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

엡 5:18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이미 안에 계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유지하라는 뜻이다.

 

“바나바는--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행11;24),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행13:52)

스데반이 선택되고 세움을 받은 것은 그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사는 모습의 묘사이다. 영적인 “상태”에 관한 묘사이다.

“계속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로 있으라- 끊임없이 성령의 충만을 입고 있으라”이다.

“충만하다”는 것은 “~의 기운으로(감화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술(육체의) 기운으로 충만한 삶을 살지 말고, 성령의 기운으로 충만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렇게 평소에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갑자기 성령의 권능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과 성령의 충만한 생활을 사는 것의 둘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데반이나 바나바나 바울이나 다른 사람처럼 우리도 “성령 충만”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평소에 육체의 지배를 받지 말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항상 유지하라는 것이다.

성질난다고 원수가 괴롭힌다고 육체로 충만해지지 말고, 성령의 지배를 계속 받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내 결단에 의해서 내 선택에 의해서 되는 것이다.

성령이 특별히 부어져서 성령께서 우리를 뺑 돌려놓아야 되는 것이 아니다.

육체가 나를 지배하도록 둘 것인가, 성령의 지배에 순종할 것인가는 내가 선택하는 문제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생활상의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이 성령의 충만은 하나의 체험으로 받지 않고 인격적인 일상의 삶으로 채우는 것이다.

성령이 쓰신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살 때,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을 말씀의 통제 아래 있게 해야 한다.

 

평소에, 부부관계에서 자녀와의 관계에서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4:30).

내 정욕과 탐심과 악한 소욕에 따라 살지 않아야 한다.

 

성령에 취하면서 술에 취할 수는 없다.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6:14).

내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날마다 내가 죽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상대방을 바꿀려고 하고 복종시킬려고만 하는 사람은 헛수고로 끝나고 상처만 더 키울 뿐이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이 내 안에서 깨우치시고 주시는 생각들을 거절하거나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내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

 

기도하는 마음이 생기면 기도하라.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하라.

그것을 미루지 말라. 성령이 지시에 예민하라.

 

적극적으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너희 몸은 성령의 전이다”(고전6:19).

그분을 갈망하고 그분과 함께 교제하며 교통하기를 간절히 바라야 한다.

 

“술(육체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신다.

성령의 충만함의 지배를 받아,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부부관계에, 자녀관계에, 복종하라고 하신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을 복종시키는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유지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할 수 있다.

육체(술)로 충만해지 않도록, 오직 성령의 충만을 살도록

우리는 매 순간 우리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성령이 아니라 육체로 충만해지고자 할 때, 아, 내가 술에 취해 방탕으로 가는구나,

이러면 안 돼지, 성령으로 충만한 길을 가자 하고 자신을 추스러야 한다.

그렇게 살 때, 부부관계에는 회복과 화목이 깃들 것이고,

부모와 자녀 관계에는 사랑과 화기애애한 기운이 번져 나갈 것이다.

가정은 행복해지고 하나님은 이 가정을 축복하시고 귀한 가문으로 번영케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