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도취 빠진 대형교회 영성 회복과 점점 멀어져
이만열(72)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다니던 교회가 고신교단 소속이었는데 지금까지 그는 이 교단을 벗어난 적이 없다. 고신교단은 일제하 신사참배에 가장 강하게 저항한 교단이다. 그 저항에 민족정신이 함께하지 않았을 리는 없지만, 순교정신의 발로는 비타협적인 근본주의 신앙이었다. 그는 보수적 기독교 신앙 속에서 살아 왔지만, 보수적 신앙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배타성이나 외향성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에게서는 오늘 먹을 것이 떨어져도 기개만은 잊지 않았던 딸깍발이 선비처럼 초심이 읽힌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강자보다 약자에 귀를 열어두는 연민의 마음도 엿보인다. 그는 숙명여대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역사학자이지만 지금도 하루도 빼지 않고 성서 읽기와 기도로 한 시간 이상을 보내는 신앙인이다.
1991년엔 김진홍 목사와 함께 개신교의 대표 잡지 중 하나인 <복음과 상황>을 창간했다. 그가 한국 기독교의 초심을 열었던 서울와이엠시에(YMCA)에서 2일부터 예언자적 외침을 내뿜기 시작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8차에 걸쳐 이어지는 강좌는 '해방이후 한국 기독교역사'다.'한국 역사 속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란 주제로 이준 열사와 남강 이승훈,이동휘,김 구,안창호,조만식 등 초기 개신교인으로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선구자들을 조명한 지난해 강의 후속이다.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 옆 자택에서 강좌를 준비중인 이 교수를 만났다.
그는 왜 지금 기독교 역사를 말하는 것일까. "한국 기독교는 식민지 시대엔 독립운동을, 독재시대엔 민주화와 인권운동 등에 앞장서며 시대적 소명을 외면하지 않았다. 민족을 깨운 선구자들뿐 아니라 일제의 앞잡이였던 미국인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다 미수에 그치자 자결한 정재홍,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을 가해한 이재명 의사, 친일파 일진회 이용구를 처단하려 한 이학필 목사 등이 기독교인이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개신교)인이었고, 33인에 포함되지 않고 운동을 이끈 15명의 기독교인이 더 있었다. 당시 기독교(개신교)인은 20만명에 불과했다. 200만~300만명에 이르던 천도교인의 10분의 1에도 미치미 못했다. 그런데도 3.1운동 당시 감옥에 끌려간 사람들은 천도교인보다 더 많을 정도로 적극 참여했다."
초기 카톨릭과 조선이 극한 대립을 했던 것과 달리 초기 개신교가 비교적 쉽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독립운동을 통해 민족과 일체감을 이룬 덕이라는 게 이 교수의 분석이다. 1885년 제중원(한국 최초의 서양병원)을 설립한 의료 선교사 알렌이 복음선교사들에게 '함부로 예수라는 말을 떠들지 마라'고 경고할 정도로 초기엔 전도보다 의료봉사와 교육에 주로 앞장섰다는 것이다. 또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가 유럽과 미국의 직접 식민지가 된 것과 달리 일본의 식민지가 됐고, 당시까지는 일본의 뒤에 영국와 미국이 있다는 인식을 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기독교가 제국을 앞세운 종교라는 인식보다는 내적으로는 부국강병을 통해 자주권을 확립하고 외부로는 독립을 쟁취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강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3.1운동 뒤 '예수천당'이라는 내세 지향적인 신비주의가 풍미하기도 했지만, 1960~80년대 군부독재 시절에도 기독교(개신교)없이 민주화와 인권, 통일운동을 애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예수 믿으면 영혼 구원뿐 아니라 건강도 얻고, 부자도 된다는 만사형통론이 풍미하더니 이렇게 성장한 대형 교회들이 자기도취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불편해지는 게 더 많다"고 믿는 쪽이다. 그래서 만사형통을 지향하는 대형교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에 대해 '세상의 세력은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기독교로서 가져야할 영성은 찾기 어렵다'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교수는 초기 기독교인들과 달리 엄청난 세력을 갖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성장과 성공신화에 매몰된 한국 교회가 정작 종교 본연의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것이 회개와 정화인데, 대형화는 이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수천억원대의 건물을 짓는다는 사랑의 교회를 보는 그의 마음은 착잡하다. 그는 한국 기독교의 영성회복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눠주자'는 가난운동과 작은 교회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교수는 "모든 것을 자기 혼자, 자기 교회 혼자 다 하려 한다"며 "이제 작은 교회들이 손잡고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작지만 컸던 선구자들을 따르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가 외풍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한 것은 하나의 큰 쇠줄이 아니라 3만개의 가는 줄이 함께 엮어졌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는 3.1운동과 독립운동에서 보여준 '민족적'인 모습과 함께 반민족적인 이미지도 동시에 갖고 있다. 일부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주도한 단군과 전통문화에 대한 우상시와 파괴,남북간 민족적 화해의 저해 등이 그런 이미지를 배가시켰다. 이 교수는 '개신교와 민족'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기독교(개신교)는 보편종교이기 때문에 민족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바울서신에도 보면 '온 천하를 여러 혈통으로 만드시고, 지역과 시간에 한계를 두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이뤄진다'고 했다. 민족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민족의 문화와 가치도 소중하다."
이 교수는 기독교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도 한글 성경을 번역하면서 여호와를 하나님(또는 하느님)으로 번역해 한민족이 오랜 옛날부터 믿고 의지했던 하느님을 기독교와 접목시킨 덕이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이 교수는 "민족문화가 때로 세속화 하고 타락하면 원상으로 회복시키도록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버리게 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준 은총을 한국 기독교인들이 더 풍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개신교인들이 단군상 파괴에 앞장설 때 그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단군은 한말 독립정신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일제치하에서 맨 처음 지운 것이 단군이다. 단군을 신화로 만들어 놓고 기자와 위만, 한사군을 역사의 맨 첫 대목에 두었다. 한민족은 독립국가가 아니라 애초부터 남의 나라 식민지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서였다." 이 교수는 "그런 식으로 일제 식민사관에 동조해 단군을 지운다면 기독교가 반민족죽의로 낙인찍힐 뿐"이라며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역사 연구를 지원하고 단군 연구를 심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일제의 암울한 상태에서도 우리는 노예상태의 민족을 결집시킨 모세를 통해, 그리고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려 이긴 다윗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다니엘 등의 구약을 읽으며 민족 구원의 희망을 가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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