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진호컬럼

너무나 무례한 예수님

새벽지기1 2017. 8. 1. 07:30


존 웨슬레는 전도하고 온 제자나 교인들에게 꼭 두 가지를 물어 보았다고 한다. 우선 그 사람이 회심하고 예수를 영접했는지 물어 보았다. 아니라고 하면 그 사람이 화를 내었는지  확인했다. 회심이나 분노가 아닌 어정쩡한 반응을 보였다고 대답하면 도리어 전도하러 간 자를 야단쳤다고 한다. 복음을 정확하게 전해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십자가 복음을 전한다는 뜻이 간단히 말해 무엇인가? 너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세상에서 무슨 공적을 쌓아도 그 죄를 씻을 길이 없으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해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죽을 죄인이라고 지적당했기에 수긍하면 하나님 앞에 철두철미 뉘우치고 아니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고 대들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바울 사도는 그래서 신자는 세상 사람들에게 오직 두 가지 냄새만 풍겨야 한다고 설파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5,16)

요컨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사망과 생명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바로 하나님께 겸비하게 무릎 꿇고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평생을 그분과 상관없이 혼자 방황하다 허황되게 일생을 마치며 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영원한 형벌까지 받게 된다.

바꿔 말해 믿음이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서 좀 더 선하게 살거나 하나님을 의지해서 위로를 얻는 차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 믿고 기도하여서 병이 낫고 사업이 흥하고 아이들이 일류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예수 믿으면 영생을 준다고 하니까 열심히 믿어보자는 것도 믿음이 아니다.

신앙이란 예수를 통해 자기 존재 전부가 참 생명 가운데 들어가 그 인생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정확히는 완전 반대로 바뀌는 것이다. 진짜로 사느냐 죽느냐를 예수를 통해 판가름 받고 또 오직 그분으로 인해 실제로 살고 죽는 문제다.

따라서 신앙의 근본 출발은 예수님 그분이 과연 누구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나 성경을 배워서 따르는 것과는 다르다. 존 뉴튼이 말한 그대로다. “당신이 예수에 관해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그 나머지에 관해서도 올바를 수가 없다.”

전도 또한 반드시 예수님 그분을 정확하게 소개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기독교 교리가 아니라, 믿든지 안 믿든지 택일 하라고 해야 한다. 그 택일에 따라 영원히 살고 죽음이 갈라짐을 올바르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물론 그런 요구가 언뜻 무례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강요는 하지 말되 아주 심각하고도 진지하고 명료하게 삶과 죽음을 제시해야 한다. 최소한 상대가 예수 믿는 문제가 자기가 이해했던 도덕적, 정서적, 종교적 개선책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각인시켜 주어야 한다.

정작 예수님은 훨씬 더 과격한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2-24)

당신을 믿지 않으면 살인자이자 거짓말쟁이인 마귀의 자식이라고 했다. 또 믿지 않는 것이 바로 마귀의 욕심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귀와 동격 즉, 살인자요 거짓말쟁이라는 뜻이다. 당신을 믿고 안 믿고의 여부가 종교를 택해 신앙생활을 하는 차원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과 하나님의 아들 둘 중 하나가 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라. 이런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했을 지를 말이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고 율법과 성전제사도 성실히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어디에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한 시골 랍비가, 말하자면 경전이나 제사 같은 종교적 형식이나 체계를 전혀 갖추지도 않은 채 바로 본인을 믿으라고 했다. 베드로처럼 저는 죄인이니 떠나달라고 요구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돌로 쳐서 죽이든지 둘 중 하나의 반응 밖에 더하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좋은 소식이 되는 이유가 단순히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말로 모든 인간에게 참 생명을 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은혜 안에서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놀랍고도 엄청난 소식을 어떻게 다른 여러 종교의 하나처럼 소개할 수 있겠는가? 십자가 앞에 항복케 하든지 끝까지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고 항의케 하든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유발토록 제시 되지 않으면 다른 복음을 전했거나 참 복음을 온전하게 전하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