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특강

호기심을 버리라!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새벽지기1 2017. 7. 21. 06:57


(아래의 글은 지난 2월14-16일에 있었던 '고전읽기'를 마치고 정리한 일종의 독후감이다. 에크하르트는 존재의 신비에 대해서, 조지 폭스는 하나님의 원초적 행위에 관심을 두었다면 토마스 아 켐피스는 공연한 호기심을 벗어버림으로써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주로 언급했다. 물론 토마스는 주로 수도승들을 대상으로 진술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가 인식하고 있는 인간의 영적인 활동과 세계는 우리에게 큰 인식의 진보를 허락할 것이다)


호기심을 버리라!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토마스 아 켐피스는 누구인가?
이미 30년 전 신학대학교 학부생이었을 때 김정준 목사님이 번역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사놓고 띄엄띄엄 읽었을 뿐이지 독파하지 못해서 마음이 찜찜하던 차에 이번 대구성서아카데미 고전읽기 모임을 통해서 이를 이룰 수 있어서 기쁘기 그지없다. 김정준 목사님은 이 책을 1956년에 번역하셨는데, 요즘 새롭게 번역된 것들보다 훨씬 잘 된 번역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 책은 절판되어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박명곤 씨가 번역한(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84년) 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며칠간 읽기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의 같은 생각이었지만, 번역이 좀 서툴러 보여서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도 토마스 아 켐피스가 말하려는 영성의 전체적인 맥락은 따라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번역자에게 큰 불만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이현주 목사님의 번역도 있고, 또 다른 사람에 의한 번역도 있다고 하는데 기회가 닿으면 그 역본들을 찾아볼 생각이다. 물론 이 책의 원서는 그 당시에 신학의 언어라 할 수 있는 라틴어로 집필되었지만 우리의 번역은 모두 영어에서 중역된 것이다. 멀지 않아 라틴어에서 직접 우리말로 번역된 책이 나오리라 기대한다.


우리에게 토마스 아 켐피스로 알려진 이 인물은 1380년 경 독일의 중서부에 있는 작은 마을 켐펜(Kempen)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대장장이였던 아버지의 성을 따른다면 토마스 해멜캔이지만 켐펜 출신이라는 뜻으로 아 켐피스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는 12살 때 네델란드의 데벤터에 있는 공동체에 가입한 이후 1471년 6월25일, 그러니까 그가 최소한 아흔한 살의 나이로 죽을 때 까지 평생 수도생활을 하면서 영성 훈련에 몰두한 인물이다. 아직 부모 밑에서 귀여움을 받아야 할 나이인 열두 살에 수도원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은 오늘 우리의 눈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어쨌든지 토마스는 1413년 서른세 살의 나이에 사제 직분을 받았으며, 1425년에는 수도원 부원장을 임명되어 새로 들어온 수도사들의 교육을 맡기도 했다. 해롤드 가디너의 설명에 따르면 토마스는 어린시절부터 지적 관심이 높았으며, 독서와 명상의 조용한 생활을 원했다고 한다. “나는 작은 책과 더불어 좁은 구석에 앉아 있는 것이 이외에는 어디에서도 결코 휴식을 찾지 못했다.”는 그의 좌우명을 통해서도 토마스의 학문적이고 영적인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토마스가 수도생활을 하는 형제단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역시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작품이라고 보아야 한다. 성서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널리 읽혀졌다고 하는데, 이 책은 토마스가 47살인 1427년경에 집필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여러 나라로 퍼져나가면서 1450년에 이미 250여 종류의 사본들이 만들어졌고, 오늘날에는 700여 종류 이상의 사본이 남아있다고 한다. 최초의 인쇄는 1472년에 이루어졌고, 그 이후로 1483년에 베니스에서 인쇄되었으며, 1779년에는 대략 1,800여 종류의 책과 번역본이 나오게 되었다.

호기심에 대해서
그건 그렇고, 도대체 토마스가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무엇일까? 대개의 신비주의자들, 혹은 영성의 대가들이 비슷하지만 토마스도 역시 한 기독교인이 영적인 평화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교회에서서 거의 습관적으로 영적인 평화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이 매우 일반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특별한 신앙적 세계를 가리킨다. 무엇이 과연 영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으면서도, 또는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적인 평화를 외치고 있을 뿐이다. 대개는 교회의 조직에 묶이거나 어떤 종교적 열광 상태에 빠지거나 더 심한 경우에는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필요한 도구로 이용하는 데 머물러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영적인 평화를 누린다고 생각할 뿐이다. 물론 이런 일반적인 신앙생활을 통해서도 영적인 평화를 부분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런 방식만으로는 토마스 같은 신비주의자들이 가리키고 있는 그런 영적인 세계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이 영적인 세계도 역시 전문적인 인식과 훈련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은 일종의 ‘좁은 길’이다. 이것은 예컨대 음악경험이라는 것도 천부적인 능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아닌 경우에 모든 삶을 거기에 쏟아야만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다는 사실과 비슷하다. 물론 겉으로만 보면 실제로 음악을 체험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이비 음악가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차이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말로 설명할 필요로 없이 분명하다. 굳이 설명한다면, 음악의 본질에 들어간 사람은 음악의 존재론적 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지만, 그 소리를 들을 줄 모르는 사이비 음악가들은 자기가 음악을 만들어 내려고 부심한다. 이런 사이비 음악가들은 자신들이 음악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혹은 자기가 알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려고 애를 쓴다. 사람들의 감수성에 의지한다거나 공연하게 과장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인간학적 노력은 아무리 산을 옮길만한 능력으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은 온갖 수사학으로 꾸미는 일에 정신을 팔기 때문에 큰 열정을 보이기는 하나 결국 허무에 빠지게 되고, 그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 더 큰 열정에 사로잡히는 악순환에 갇히게 된다.


기독교 영성도 이와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다. 창조의 능력이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존재론적 ‘자기계시’에 귀를 기울일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인간의 열정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에 사로잡힌다. 교회당을 짓는다거나, 해외 선교사를 보낸다거나 복지관을 세우며, 혹은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자기를 학대하거나 반대로 도덕주의적 우월감에 빠지면서 경험하는 어떤 종교적 열정을 영의 활동으로 착각한다. 이런 인간의 열정은 모든 종교 일반에 현상하고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스포츠와 연예 오락에도 약간 다른 방식이지만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로마 가톨릭 신자는 마리아 기도나 묵주기도를 하루에 백번씩 암송하는 것으로 대단한 영성을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통일교 신자들은 문선명을 위해서 거리에 나가 장미꽃을 팔면서, 혹은 대규모 국제합동 결혼식에 참여하면서 뜨거운 감동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일들은 인간학적 열정에 의존하는 모든 인간의 행위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종교현상이다.
토마스는 이런 모든 시도와 노력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완벽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힐 때만 우리가 내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삶을 역동적으로 동기화하는 ‘호기심’을 포기하라고 충고한다. 이 단락을 김정준 목사님의 번역으로 읽어보자.

나의 아들아, 호기심이란 악에 주의할지어다. 유익이 없는 일에 분주한 사람이 되지 말지어다(딤전 5:13). 그런 것이 네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2). 너의 관심이 사람이 선하다는 일에 관한 것이냐? 반대로 악하다 함에 대한 것이냐? 그가 하는 말에 관한 것이냐? 그가 행하는 일에 관한 것이냐?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함에 대한 답변을 찾으려 함이 너의 생의 목적이 아니고 그대 자신의 생활 전폭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롬 14:12). 그런데 왜 너와 상관이 없는 일에 간섭하려고 드느냐? 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알고 헤아려서 되는 일 중에서 내 지식이 미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의 생명을 알고 그의 사상, 그의 계획, 그의 욕구가 무어신가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나에게 대한 관심에 너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고 그대 마음에 평화를 찾으라.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즐기는 사람은 그 일을 행함으로 인한 괴로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의 말과 행동이 그의 머리 위에 항상 있나니 이는 내가 그를 다 알고 내 앞에서는 그 자신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힘 있는 원조자만을 따르지 말고 만인이 즐기는 인기 있는 일에나 친구가 주는 특별한 사랑에도 그다지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이 모든 것은 혼란을 가져오며, 너의 마음을 불안으로 가득 채우나니 만인 내가 그대에게 임하기만 구하며, 너의 마음 문을 나를 위해 열고 있으면 내가 친히 말해 줄 것이요, 나의 비밀을 너에게 알려 주리니 그러니 항상 준비하여 기다리고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네가 힘써야 할 것은 겸손하게 되는 일이다.(3권24장).

호기심이 왜 악인가?
우리 <고전읽기> 모임에서 이 대목을 읽고 잠시 생각을 나눌 때 어떤 회원이 말하기를, 토마스가 나쁘게 생각하는 호기심을 유아 교육에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본다는 것이다. 사실 어린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든 사물에 대해서 호기심을 기울인다. 봄이 되면 왜 땅 속에서 새싹이 돋아나는지, 왜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지, 왜 무지개가 뜨는지, 나는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많다. 자신 앞에 있는 모든 사물과 사태에 대해서 호기심을 기울임으로써 자신과 대상과의 관계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보해나간다는 것은 그 어떤 교육학적 이론이나 신학적 이론에 상관없이 우리의 삶과 그 성장 과정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린이들에게 나타나는 호기심과 토마스가 말하는 호기심에는 차이가 있을까? 유아교육학이 말하는 호기심은 어떤 근본에 대한 관심이라고 한다면 토마스가 경계하고 있는 호기심은 결국 자기에 대한 관심이라고 말이다. 이 문제는 여전히 생각할 거리가 많으니까 여기서는 이 정도로 접어두고, 토마스가 호기심을 부정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을 좁히도록 하자.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호기심은 대개 우리의 감수성과 연관되어 있다. 흡사 연예계나 스포츠계의 스타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소녀들처럼 우리의 호기심이라는 것은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우리의 심리적 현상이다. 부동산, 주식, 홈쇼핑, 각종 루머에 솔깃하다는 것은 거기서 어떤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뜻이다. 대리만족일 수도 있고, 백설공주 콤플렉스일 수도 있다. 이렇게 작동되는 우리의 감정과 심리라는 것은 너무나 쉽게 변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영적인 평화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일본의 젊은 아줌마들이 <겨울연가>의 촬영장소인 춘천을 방문하고, 배용준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몇 시간씩 추위와 더위를 참는다고 한다. 겨울연가와 배용준을 통해서 그들의 호기심이 자극되기는 하겠지만 그 뒤에 남는 것은 공허와 허탈일 뿐이며, 또는 더 뜨거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욕망일 뿐이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사이비 소종파 운동에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소위 교주는 이들 종파에 빠진 신도들에게 절대적인 호기심의 대상이다. 교리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교주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호기심의 대상이다. 교주의 손과 몸, 그가 쓰는 경전과 일용품, 순수건, 심지어는 그가 세수한 물까지도 신도들에게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마 정통 교회에도 이런 호기심에 근거한 신앙 행위가 적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교회가 어느 지역에서 가장 크다거나 어떤 특징이 있다는 것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신앙행위가 그런 것들이다.


일상생활로부터 종교생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호기심을 보이는 있는 이런 모든 현상들은 비록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영성을 훼손한다는 점을 토마스는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귀하다고 생각하는 우정에도 마음을 지우라고 말한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를 혼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부모와 자식, 친구와 친구,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근거라고 배우고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 우리에게 토마스의 주장은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간관계의 속성을 조금이라고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인간관계라고 하더라도 우리를 궁극적으로 위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쏟고 있는 사랑을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말들을 하지만,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모의 사랑도 궁극적인 사랑은 될 수 없다. 일단 아무리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 여전히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점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절대적인 희생의 사랑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한 인간으로서 부모는 궁극적으로 자식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자식이 밥을 먹지 않는다고 고집을 피울 때 따끔하게 혼을 내야하는지, 그냥 참고 있어야 하는지 우리에게는 확신이 없다. 다만 우리가 주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행동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 생각, 행동은 경우에 따라서 자식을 파괴하는 쪽으로 작용할 개연성이 있다. 사랑이 단지 감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생명의 능력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이런 부분적이고 한정적인 행위를 결코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 존재론적인 차원에 갈 것도 없이 단지 사랑이라는 현상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이것으로 우리가 참된 위로를 얻지 못한다는 게 분명해진다. 우리는 사랑하거나 사랑받는다고 할 때 늘 그 대상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강약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그 대상에 의해서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 효심이 깊은 사람은 친구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고,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식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부분적인 관계에만 충실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실존적인 한계를 놓고 본다면 우리가 지향하는 모든 가치 있는 것들도 결국 우리의 영혼을 파괴시킬 가능성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그 대상들은 우리의 행복과 구원 앞에서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아무리 좋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놓기 때문이다.

죄 현실주의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매우 현실적으로 바라본다. 이 말은 곧 인간을 본질적으로 악한 존재로 본다는 뜻이다. 겉으로 아무리 선한 말과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악한 생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창세기의 타락설화에서 보듯이 인간은 악에 의해서 유혹받기도하며, 유혹하기도하며, 그것을 실행하기도 하면서, 때로는 변명과 자기 합리화에 매우 재빠르며 익숙하다.
이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행하는 모든 악과 그런 경향성이라는 건 대개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요소들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이제는 완전히 우리의 본질이 된 성향인지 모르겠다. 성범죄라든가, 경제사범이라든가, 또는 폭력 같은 것들도 인류가 다른 동물들이나 자기들끼리 벌였던 생존경쟁의 흔적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우리의 조상인 유인원들이 지구에서 생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침팬지 집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 집단에서 가장 힘이 센 수놈이 나머지 모든 암놈과 짝짓기를 한다는 건 우량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본능에 의한 것이다. 이런 종족 보존을 위해서 수놈 침팬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사생결단이다. 아마 인간에게도 이런 생존 본능의 흔적들이 남아 있지 않았겠는가?


이 말은 곧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도덕적인 품성을 지켜내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에도 침팬지와 같은 생존 본능의 욕구가 작동하기 때문에 폭력은 거의 통제 불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악이라는 것은 그것의 가치론적인 평가를 내리기 전에 이미 인간에게 숙명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폭력과 악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런 문제가 몇몇 종교적 교리나 도덕 교양의 강습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접근하는 것은 지나치게 나이브한 생각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뿐이다.


글의 흐름이 약간 옆으로 흘렀지만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타락, 기독교 죄론에서 말하는 원죄, 그리고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런 신비주의자들의 인간 이해는 인간을 죄의식에서 고통 받게 하자는 게 결코 아니라 그것의 현실성을 직시하려는 일종의 인간 해석학이다. 이는 곧 피조물인 인간이 감당해야 할 어쩔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이제 그런 숙명 앞에서 우리는 해결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사람에게 기대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충고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무리 그럴듯한 윤리, 가르침,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치우치는 한 인간은 참된 위로를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또 친절하게 한다 할지라도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니(렘 17:5) 전적인 신뢰와 깊은 마음을 바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는 어떤 사람이 때때로 당신을 반대하거나 당신에게 대항한다 하더라도 그로 인하여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오늘 당신의 편이 되어주던 사람도 내일이면 당신을 반대하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사람이란 날씨처럼 변덕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2권 1장).

결국 참된 위로와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자기의 모든 걸 맡겨야만 한다. 이 두 사실은 맞물려 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을 끊어야만 하나님만을 희망할 수 있으며,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둔 사람은 사람에게 호기심을 느끼지 않는 법이다. 사람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내쉴 수는 없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재물을 믿을 수는 없다. 사람에게 빠져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빠질 수 없다. 아마 여기서 좀 혼란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야고보의 가르침을 기억한다면 사람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결코 이원론적인 게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토마스도 역시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혹은 두 가지 일의 선후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지금 기독교인의 영성을 말하는 중이다. 이 영성이 풍요로워지는 길에 대해서 언급하는 중이다. 이 영성은 피조물인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창조자이신 하나님, 그 창조의 영인 성령, 부활을 통해서 생명을 앞당기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한다는 말이다.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만 우리가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며, 따라서 영적인 풍요로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참된 위로와 풍요를 누린 사람이 정치를 하든지, 과학을 하든지, 복지활동을 하든지, 그 이외의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두 번째 문제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이런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관계가 없으면서 순전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언가 가치 있는 것들을 찾는 노력은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어리석음이다.

계시 일원론
웬만큼 기독교 교리와 이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여기까지의 설명에 대해서 그런대로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우리는 좀 심각하면서도 예민한 상황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삶이라는 게 일종의 아포리즘(경구)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실체적으로 경험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한다거나, 희생적으로 살아가는 것,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 같은 것들은 우리의 생각 속에 확연하게 들어오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간다는 것, 그래서 내면적인 위로를 경험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물론 이런 문제를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기도를 많이 하면 은혜를 깨닫게 된다고 말이다. 교회 봉사를 많이 하면 은혜가 넘친다고 말이다. 성서를 많이 읽으면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게 기도원도 많고, 성서연구 단체도 적지 않고, 큐티 공부도 많고, 심지어는 성서쓰기 모임도 있다. 우리나라의 설교처럼 간증이 많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이 간증이라는 게 온통 은혜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런 구체적인 방식으로 우리는 은혜를 경험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상당히 위험한 함정이 있다. 이런 방식의 은혜는 대개가 주관주의적 종교경험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흡사 여고생이 노총각 선생님을 사랑하게 된 것과 비슷하다. 자기에게는 경천동지할 큰 사건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건 유치한 환상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런 주관주의적 종교경험은 앞에서 토마스가 계속 경계한 사람과의 관계에 몰두하는 현상과 다른 게 아니다. 이는 곧 상황에 따라서 일희일비하는 호기심에 머무는 것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만이 아니라 모든 신비주의자들과 영성이 대가들이 말하고 있듯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의 신앙적 태도는 ‘기다림’에 있다. 자신이 무엇을 성취하거나 자기만족에 빠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영적인 세계를 약간이라도 맛본 사람들이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이는 곧 우리의 인식론적 작업을 펼치기 전에 하나님의 계시가 주도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에만 완벽하게 집중한 사람들이 곧 신비주의자들이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당신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 나는 주의 종이오니 주의 경고를 알아차릴 수 있는 총명을 주십시오(시 119:125).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신 32:1,2).
모세나 다른 어떤 선지자도 말하지 말게 하옵시고, 당신께서 말씀하소서. 모든 선지자들을 감동케 하시고 영감을 불어넣어 밝혀주신 주님께서 홀로 친히 말씀해 주옵소서. 그들의 도움 없이 당신만이 저를 완전하게 가르칠 수 있사오며, 저들은 당신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나이다.(2권2부).

하나님의 말씀(계시)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게 무엇일까? 대개의 설교자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주장하는데, 전하기 위해서는 일단 듣는 게 전제된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시인이 될 수 없듯이 성서를 아무리 많이 읽는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는 없다. 시인들이 언어로 무엇을 나타내기 전에 그 언어의 세계를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하듯이 설교자도 역시 설교하기 전에 먼저 보고 들어야 한다. 그렇게 보고 들은 사람에게서 나온 설교는 계시의 지평에 들어갈 수 있지만 단지 자기 생각에만 머문 채 말재주로 무엇을 말하는 설교는 단지 도덕적 교훈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한다. 이 차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하고, 다만 아무리 비슷한 형식으로 쓰였어도 참된 시가 있고 거짓 시가 있다는 사실만 일러두겠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런 하나님의 계시에 집중할 수 있기 위해서, 이것이 바로 영성 훈련인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글의 제목처럼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버리는 데서 시작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신비주의자들이 침묵과 고독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침묵과 고요 속에서 경건한 영혼은 유익을 입으며 자라나고, 성경의 숨겨진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1권20부).
이런 점에서 어떻게 보면 신비주의자들은 이기주의자들처럼 보인다. 옳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면에서 이기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한 이기주의이다. 이런 세계를 아는 사람은 시나브로 이기와 이타의 경계 너머에 있는 참된 자유, 기쁨, 평화, 위로의 세계와 연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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