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라은성목사

표절을 피하는 방법

새벽지기1 2016. 11. 11. 13:14


들어가면서

최근에 일어나는 ‘표절’ 시비는 정치, 경제, 예술, 체육, 문학에서만 그치지 않고 신학계와 목회에 까지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고, 점점 이 시비는 확산되어 가고 있다. 글을 쓰는 자라면 누구든 표절의 유혹을 쉽게 받는다. ‘표절’에 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글을 쓰는 사람을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단순히 “출처나 인용하면 되지!” “인용하지 않아서 그래~”라고 말할 뿐 무엇이 표절이고 어떻게 대체해야 그것을 피할 수 있는지 올바른 개념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어릴 때부터 ‘짧은 글 짓기’라고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용어가 있다. 정말 이 시간이 나에겐 힘들었다. 대학교 졸업 논문을 써야 하는데 국문학 교수님을 통해 논문 작성법을 배운 기억이 있다. 참 고마운 시간이었다. 그때 썼던 글을 지금 읽으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처음으로 쓴 것이라고 변명해 보지만 부끄러움에서 자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을 쓰는 흉내라도 내기 위해 타 대학교의 도서관을 방문하여 열심히 자료를 모을 수 있는 한 모았던 기억이 새롭게 난다. 또 신학대학원에서는 졸업 논문을 누구든지 써야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럽지만 무슨 글을 썼는지 모를 정도로 그냥 써서 제출했고 졸업했다. 나에겐 지울 수 없는 부끄러운 과거이다.

그러다보니 유학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석사(Th.M.) 과정을 졸업해야 하는데 논문 쓰는 것이 나에겐 큰 공포였다. 졸업논문을 대신하는 글을 써서 졸업하여 학위를 받았지만 비겁하게 논문을 쓰지 못했다는 수치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다시금 신학 전공을 바꾸면서까지 하면서 신학석사 과정을 또 밟았고 이번에는 담대하게 졸업 논문을 썼다. 이렇게 쓸 수 있었던 것은 신학 논문 쓰는 법을 한 교수가 충실하게 가르쳐줬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 정도로 유익했던 시간이었다. 그런 후 박사과정에서 글을 쓰는 요령을 배우게 되어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런 말이 있다. “박사 학위는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증을 얻는 것이다!”. 한국에 귀국한 후 쓴 처녀작품이 신학논문 작성법에 관련된 책이다(『연구주제부터 포맷까지』). 이 책은 현재 신학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는 목회 후보생이나 휴학생에게 교과서나 참고도서로 사용되기도 한다.


글을 쓰려면

글은 설득을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독자나 상대방을 설득시키려면 객관성, 논리성 및 일관성이 요구된다. 객관성을 위해 타인의 글과 주장이 요구된다. 글의 구성에 두서가 없으면 독자는 금새 고개를 돌리고 말 것이다. 무엇을 말하든지 저자는 하나의 주제를 끝까지 풀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글을 읽더라도 독자는 머리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정말 필요한 내용에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설명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독자는 싫증을 느끼고 말 것이다.

① 일관성을 위한 글을 쓸 때면 항상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연구주제(research topic)를 정하는 것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를 착상하라는 것이다. 그 착상이란 과정을 밟기 위해선 반드시 ‘주요한 질문’을 가져야 한다. 주요한 질문이란 글을 쓰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놓쳐선 안되는 것이다. 어디를 읽어도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글의 내용을 아무리 확대하여 전개하더라도 다시금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위해, 즉 이 질문을 위해 부가 질문들을 만들어야 한다. 주요한 질문의 답을 찾아가기 위한 질문들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본론을 쓸 때는 소제목으로 등장하여 글을 구성하게 된다. 그 주요한 질문이 타당해야 한다. 타탕하기 위해선 부가 질문이 나타나야 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사회 이슈에 대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주요한 질문을 가졌다고 하자.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부가 질문을 만들어 본다. “기독교와 사회와의 관계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는?” “교회의 임무는?” “이 질문을 다뤘던 훌륭한 학자는?” 등등의 부가 질문이 등장한다.

② 글의 구성으로 들어가 보자. 글의 구성은 곧 소제목으로 나누는데서 시작한다. 주요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부가 질문을 만들어야 한다고 언급했던 것을 기억하자. 그 부가 질문이 곧 글의 소제목이 된다. 소제목이 만들어지면 문단이 만들어질 것이다. 문단이 길어지면, 하는 수 없이 소제목에 또 소소제목을 만들게 된다. 제목을 붙일 수 없게 되면 문단으로 남게 된다. 한 문단 안에는 한 가지 내용 또는 주제만 다뤄야 한다. 두 내용이 들어갈 것 같으면 언제든 문단을 나눠야 한다. 이렇게 하여 글을 구성시켜 나간다. 하지만 그 소제목도 글을 쓰기 전에 만든 질문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 도중 소제목 또는 부가 질문이 바뀔 수 있다. 막상 글을 써다보면 보다 논리적 글이 나오기 때문이다.

③ 글을 쓸 땐 항상 들어가는 서론이 있게 된다. 서론엔 지금까지 설명한 주요한 질문과 부가 질문이 나오게 배경이 들어간다. 이것을 가리켜 ‘방법론’(methodology)이라고 부른다. 연구 논문(research paper)이라면 논문에 사용되는 주요한 자료들을 소개하는 것이 좋다. 서론에는 주요한 질문, 즉 연구 주제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유의할 것은 결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글을 쓰는 저자가 내리겠지만 결코 내리는 이유를 설명하지 말아야 한다. 그 설명은 본론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서론에는 질문에 대한 가정적 답변, 즉 저자의 답변만을 내린다. 서론의 요소는 주요한 질문, 부가 질문, 주요한 자료, 글을 쓰는 이유, 한계와 숙제 그리고 기여도를 포함한다.

④ 본론의 내용을 다뤄보도록 하자. 서론에서 가진 질문들과 가정적 답변은 본론에서 설명되거나 입증되어야 한다. 실례를 들 수도 있고, 다른 유명 저자나 학자의 글을 인용하여 자신의 설명을 뒷받침할 수도 있고, 반대 견해를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돋보이게 할 수도 있다. 아무튼 본론은 서론에서 제시된 질문에 대한 입증 또는 설명하는 내용을 담는다. 본론은 부가 질문으로 구성되는데 그 구성 순서는 논리적이어야 한다. 이 논리적인 것을 통해 저자의 학문서의 깊이와 너비를 측정할 수 있다. 논리적이란 ②의 지침을 따라 글을 쓸 때 나타난다.

⑤ 서론, 본론 및 결론으로 구성된 글에서 마지막인 결론을 어떻게 내릴까? 결론의 질문에 대한 답을 결론에서 간략하고 명쾌하게 저자는 제시해야 한다. 동시에 중요한 것이 있는데 본론에서 설명 후 새로운 사실을 밝힌다. 주의 할 것은 본론에서 저자의 견해를 밝혀선 안된다는 것이다. 본론은 독자를 설득시키려는데 초점이 맞춰있기 때문에 입증하는데만 관심을 가져야 하고 저자의 주장은 결론에서 내려져야 한다. 결론은 단순히 나가는 글이라고만 생각해선 안된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약과 함께 새로운 주장, 즉 저자의 유추적 견해를 밝혀야 한다. 서론에서 이미 밝힌 가정적 질문을 이제 입증으로 본론에 제시했으니 논리상 결론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과 아울러 저자의 견해를 밝히고 새로운 사실을 소개한다.

⑥ 서론과 결론은 일치해야 한다. 한 종이를 네 등분하여 접는다고 상상해보라. 첫 번째 부분과 마지막 부분이 일치한다. 이처럼 서론과 결론은 질문과 답이라는 점에서 일치해야 한다. 결론만을 보고서도 서론과 본론에서 저자가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선 본론을 읽어야겠지만 서론을 보고서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파악되어야 하고, 결론을 보고서 저자의 주장을 충분히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본론을 통해 저자의 논리적 입증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를

이 글을 읽는 독자를 목회자라고 가정했을 때 설교 작성에 도움이 되는 짧은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설교는 일반적 글과 너무나 다르다. 웅변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강연도 아니고, 이야기도 아니고, 주장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선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장도 아니고 전달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 말씀에 대한 강의도 아니다. 설교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또 설교는 훌륭한 설교를 그대로 낭독하는 것도 아니다. 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설교를 위해선 많은 선배들이 좋은 글을 내어놓았기에 여기선 한 가지만 제안하려고 한다.

대체적으로 설교를 설교학이라는 원칙에 맞춘다. 하지만 설교는 학문이 아니다. 잘하고 못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 이미 설교가 아니다. 바르고 그릇된 것에 관심을 가져야 설교가 되는 것이다. “순전하게, 진지하게, 정직하게, 바르게”라는 부사가 붙어야지 “좋게, 재미있게, 짧게, 멋있게, 감동 있게, 은혜 되게”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 이미 설교가 아니다.

설교는 설교자에게 묵상되고, 소화되고, 되새김되고, 실행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정해진 성경 본문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고, 자신의 삶에 반영하여 실천하려는 의지로 선포하는 것이다. 경험이 중요하고, 지식이 중요하고, 해석이 중요하다. 설교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역시 적용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 본문이 아무리 그렇게 말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어떻게 살라는 것이냐?” 이 질문에 대한 설명이 나타나야 진정한 설교가 되는 것이다. 그 순서상 설교학이 요구되거나, 해석을 할 때 성경신학과 교의신학이 동원되거나, 적용을 위해 교회역사나 자신의 경험이 요청되기도 하지만 결국은 설교자 자신이 충분히 소화된 내용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횡설수설하게 된다. 설교를 들은 청취자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설득을 목표로 삼지 말고 바른 것을 선포하는데 목표를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만 즐겁게 할 뿐이다(딤후 4:4).

성경을 해석학적으로 분석하고, 성경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조직신학적으로 점검되었다 하더라도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감동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들을만한 강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설교는 글을 쓰는 것과 다르다. 논리적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자신의 설교를 위해 훌륭한 분의 삶, 저서, 글과 시사적 사건의 전말을 언급할 수 있다. 이것 역시 그 출처가 어디에서든지 예수님께서도 “기록된 바”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말인지 그렇지 않은 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마치 스스로 깨달은 것처럼 설교한다면 그것은 도둑질하는 것이다. 겉으론 누구의 말인지 분간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이미 도둑질 한 것이다. 설교는 사람 앞에서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이뤄지는 것임을 안다면 남의 말을 자신의 말로 바꿔선 결코 안된다.


표절이란?

설교에서든 글에서든 남의 글을 도용하는 것의 유혹은 누구나 받는다. 그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나 지식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뭔가 쓰고 싶은 주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다면 굳이 남의 글을 인용하려고 유혹을 받지 않겠지만 모든 자가 그렇지 않다. 또 시간과 내용이 충분하다고 해서 표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습관적으로 쉬운 길을 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대해선 여기서 말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아무튼 시간이 촉박하고 충분치 않고 의욕만 앞서면 표절의 유혹을 피하기 어렵다. 표절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피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표절하는 경우도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밝히지 못한 경우도 혹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표절의 경우를 여기서 지적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표절의 유혹에서 자유할 수 있는지 살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답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절차가 요구된다.

① ‘자기 말로 풀어쓰기’(paraphrasing)를 습관화 하라. 대학생들에게 늘 제시하는 과제물은 자기 말로 풀어 쓰라는 것이다. 교수들은 과제로 요약이나 느낀 점 또는 서평 하라고 한다. 어떤 경우엔 발표하도록 이끌기도 한다. 교수의 의도는 글을 쓰거나 발표하는 습관을 학생들이 가질 수 있길 바라는 것이다. 아무튼 글을 쓰는 훈련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말로 풀어 쓰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어느 누구의 견해나 내용을 소화하여 쓰는 것이다. 읽었거나 아는 내용 또는 원저자의 의도와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그 책을 보지 않고도 그 내용을 자신의 글에 표현하는 것이고 자신의 표현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을 쓰는 자에게 이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원저자의 내용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이해하므로 표현하는 것이다. 어떻게 표현하든 어디서 말하든 충분히 원저자의 의도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자기 말로 풀어쓰기’를 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성경 어느 본문이든지 채택한다. 누구나 잘 아는 창세기 1:1~31을 자기 말 풀이 한다고 하자. 1장의 내용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면 성경을 덮고 그 내용을 써보도록 한다. 본래의 내용을 충분히 알지 못하면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 책을 덮고 그 내용을 쓰지 못하게 되면 표절에 가깝게 된다. 또 성경에 사용된 표현과 단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성경을 보면서 쓰게 되면 결국 직접 인용하는 것이 낫지 그렇지 않고 그 성경의 단어와 표현을 사용하면서 솔직하게 직접 인용하지 않았다면 표절인 것이다. 표절과 자기 말 풀이는 이렇게 달라진다.

② ‘직접 인용’(double quotation) 하라. 자기 말로 풀어쓰기가 습관화 되어야 한다. 책을 보지 않고 어떤 내용을 쓸 수 있다면 아무리 표현이 같고 단어가 같다 하더라도 표절이 아니다. 참고해야하고 또 참고했다면 반드시 출처를 밝혀야 하는데 이것은 각주나 미주로 나타난다. 참고하지 않고도 글을 쓰거나 표현했다고 하자. 친절하게 어디에서 어디까지 참고했다고 각주나 미주를 달아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좋다. 내용이 유사하다는 것이지 표절은 아닌 것이다. 반드시 참고했다면 출처를 밝혀야 정직한 것이고 참고하지 않고 표현했다면 표절이 아니다. 창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고하면서 원저자의 표현 이상을 표현하기 어렵다고 할 때는 또는 모방이나 빌려 온다면 차라리 자기 말로 풀어쓰지 말고 ‘직접 인용’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지나치게 많은 ‘직접 인용’이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원저자의 표현 이상으로 쓸 수 없거나 정확한 내용을 표현해야 한다면 ‘직접 인용’을 하는 것이 좋다. 이 절차에선 ‘들여 쓰기’(indention 또는 indentation)로 글에 표현된다. 이 경우는 인용 내용이 많을 때이고, 적은 경우에는 직접 인용부호(“”)를 사용한다. 이 부호를 쓰거나 들여 쓰기를 했다면 반드시 각주나 미주에서 출처를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표절 시비의 대상이 된다. 참고했는데도 또 원저자의 표현을 빌려 사용했는데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표절 시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또 직접 인용의 경우에도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표절이 된다.

③ 출처를 밝혀라. 어느 글이든 누구의 글이나 도움 없이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표절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말 그대로 표절하는 것, ② 개념적으로 표절하는 것 그리고 ③ 구조적으로 표절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출처를 밝히면 표절의 범죄에서 피할 수 있다. ①의 경우엔 직접 인용이기에 반드시 직접 인용부호(“”)나 ‘들여 쓰기’를 사용하여 출처를 밝히면 표절의 범죄에서 피할 수 있다. ②의 경우엔 원저자의 표현을 사용했기에 이것 역시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표절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교묘하게 몇 단어나 표현을 달리 한다고 해서 표절 시비의 도망칠 수 없다. 이것을 벗어나려면 또는 출처를 밝히지 않으려면 참고하지 않고 순전하게 자신의 말로 표현하면 된다. 그리고 ③의 경우는 원저자의 직접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지만 전체적인 개념이나 의도를 빌리는 경우이다. 저자의 글을 줌인(zoom in) 하면 드러나지 않지만 줌아웃(zoom out) 하면 시시비비가 드러난다. 이 경우에도 대략의 출처를 어디서든 밝히는 것이 좋다. 한 번 정도 각주에서 또는 서론에서 원저자의 글에서 가져온다고 해 놓으면 표절 시비의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④ 인용 방법을 터득하라. 인용, 즉 각주나 미주를 아무렇게나 표현하면 글 쓰는 자의 자격이 상실된다. 학계에는 학문계열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인문계열에 신학이 속하는데 크게 두 종류의 인용 방법, 즉 서식(format)이 있다. 하나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만든 튜레비언(Turabian) 형식이 있다. 다른 하나는 하버드 형식이다. 어느 방법을 선택하든 한결 같이 사용해야 한다. 인용 방법이 혼란스러우면 글을 읽는 독자는 헷갈릴 수밖에 없다. 어느 방법이든지 간에 한결 같으면 독자는 쉽게, 깊게, 넓게 그 내용을 확대시켜 나갈 수 있기에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나가면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표절이란 말에 주눅이 든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주제가 아니다. 훌륭한 저자나 글을 우리는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습관을 먼저 가져야 하고, 논리적으로, 객관적으로, 일관성 있게 글을 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하루아침에 불가능하겠지만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터득할 수 있다. 특별한 은사를 가진 자만 글을 쓴다고 하지 말고, 꾸준히 훈련하도록 하자.

이상에서 나는 글을 어떻게 구상하고, 구성하고, 쓰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밝혔다. 주요한 질문으로 구상하고, 부가 질문으로 구성하고, 자기 말로 풀어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충분한 지식을 가지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독서가 필요하다. 무슨 주제에서든 박식한 자는 드물다. 하지만 주제를 풀어 쓸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을 연구방법(research method)이라 부른다. 이 방법에 따라 훈련을 받으면 누구든 표절 시비에서 벗어나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

한국 사회에 치명적인 논란 중 하나는 표절 시비다. 목회자나 신학자로서 아니 목사후보생으로서 이 시비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이런 논란을 통해 자숙하며 바른 글을 쓰는 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 맹자의 말이 생각이 난다. 고신얼자(孤臣孼子)! 위기가 곧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사건을 보고 비판하고 비난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라고 권하셨다(눅 13:3~4 참고). 표절 시비는 큰 도전이 되어 우리 모두가 자신을 돌아보아 보다 정직한 설교와 책을 후배와 후손들에게 남겨줬으면 하는 심정으로 간략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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