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역사비평에 대해
개신교 신자들은 마틴 루터의 ‘솔라 스크립투라’ 명제를 거의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심지어는 신학교 강의실 안에서도 건전하고 열린 신학적 담론이 형성되기가 힘들다. 그들은 루터의 이 명제가 교회의 권위를 일방적으로 강조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과 대립적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또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은 문서라고까지 깎아내린 루터의 언급을 외면한 채 본인들이 원하는 쪽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사람 교황을 우상숭배하고, 개신교 신자들은 종이 교황을 우상숭배 한다는 말이 정확한 지적인 것 같다.
우리 개신교 신자들이 성서를 그렇게 기계적인 차원에서 절대화 하는 것은 단지 루터의 그런 명제만이 아니라 이미 성서가 그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데에 그 근거가 있다. “성경은 전부가 하나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딤후 3:16).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도 이와 비슷한 의미로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 5:18).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이 본문들이 말하는 성경과 율법은 구약을 가리키고 있으며, 또한 구약성서가 기원후 70년 얌니야 종교회의에 이르러서야 정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위의 본문에 근거해서 성서의 권위를 보증하려는 것은 무리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구약성서, 그리고 신약성서 사이에 매우 복잡한 역사적 긴장이 놓여 있긴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신구약성서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틀린 건 아니다. 다만 성서를 폐쇄적인 규범으로 접근하는 자세는 별로 지혜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당하지도 못하다. 지혜롭지 않다는 말은 성서의 절대화는 이단의 발호를 부추긴다는 의미이다. 한국의 수많은 이단들에게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아무리 무모한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성서 구절로 뒷받침하기만 하면 그들은 아주 쉽게 일정한 세력을 얻는다. 정당하지 못하다는 말은 원래 역사적으로 전승된 성서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의 독자들에게 전달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역사비평이 그런 폐쇄적인 태도로 인해서 해체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왜 성서를 역사 비평적으로 읽어야만 하는가? 우선 그 이유는 오늘 우리가 대하고 있는 문자로 된 성서 이전에 ‘소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십계명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번갯불을 통해서 돌판에 글씨를 새긴 것처럼 성서가 보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문자보다 먼저 소리가 있었다. 성서는 하나님이 글씨를 쓰셨다 하지 않고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할 때 무슨 언어로 말씀하셨는지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셨으니까 결국 히브리어가 하나님의 언어이신가?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언어가 헬라어라는 뜻일까? 아무리 근본주의적인 생각에 젖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서기자들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신 것뿐이고, 실제로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자기의 모국어로 기록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복잡한 상황 속으로 들어간 셈이다. 성령의 감동, 성서기자, 그의 모국어, 그리고 구체적인 성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런 정보 앞에서 우리는 성서가 어떻게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한 초보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성령이 성서 기자를 감동시켰고, 그 감동에 따라서 성서 기자가 성서를 기록했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형식적인 대답으로 성서 형성의 깊이를 모두 찾아내기는 힘들다. 도대체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더 근본적으로는 성서 기자에게 영적인 감동을 준 성령은 누구인지 아는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문서들이, 신약의 경우만 본다 하더라도 수백 년 동안 경전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즉 신약성서가 기록된 그 시간으로부터 경전이 될 때까지, 최소한 300년이라는 역사는 무엇일까? 이런 대목에서 자꾸 이성적으로 따지지 말고 믿으면 되지 않는가, 하고 윽박지르면 더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우리가 성서를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최대한으로 따져볼 건 따져보아야 한다. 교부들은 이렇게 시시콜콜하게 따지는 방식으로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27권의 신약성서를 경전으로 채택했다.
신약 문서가 처음으로 기록된 그 순간부터 정경으로 결정될 때까지에 해당되는 시간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잡으면 350년, 짧게 잡으면 300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은 오늘 우리 손에 남아있는 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짚어야 할 대목이다. 그 역사의 깊이로 들어가는 게 곧 성서의 역사비평이다. 비록 그 작업이 고된 노동을 필요로 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그런 역사활동에 깊이 관여한 덕분으로 오늘 역사적 기독교가 이렇게 자리를 잡았으며, 또한 우리에게 성서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런 작업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역사비평이 신앙을 세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허무는 일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가 감당해온 그런 역사적 무게를 손쉽게 피하거나 거부하려는 일종의 신앙편의주의에 불과하다. 내 생각에 오늘 우리가 이런 역사비평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후손들에게 역사의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의존하려고 했던 기독교의 고귀한 전통을 넘겨주는 최소한의 당연한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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