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학단상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기록된 이유

새벽지기1 2016. 11. 5. 08:04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기록된 이유

예수님을 비롯해서 사도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신약성서는 모두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그게 좀 이상하지 않은가? 신약개론을 간단하게나마 공부한 사람들은 이에 대한 대답을 이미 갖고 있을 것이다.
신약성서를 읽어야 할 독자들이 모두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대답이 그것이다.
그런데 신학적 사유라는 것은 어떤 정답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대답의 이면인, 그 너머를 향해서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신약성서가 예수의 언어인 히브리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이지만,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큰 호기심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데서부터 우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 또는 감추어진 비밀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찾아나갈 수 있다. 예수 사건과 곧 이은 오순절 공동체, 그리고 그리스 공동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사도행전과 서신에 모든 게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말할지 모르나 그게 모든 걸 담아낸다고 보는 건 참 순진한 발상이다.


우선 신약성서만 해도 그 당시 유포되고 있던 훨씬 많은 문서들 중의 일부이다. 이런 문서라는 건 그 이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다는 걸 전제한다. 그런데 문서가 그 사건을 정확하게 재현하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 예컨대 광주 5.18민주항쟁에 대한 여러 문서가 우리에도 있지만 그 문서들이 그 항쟁의 실체적 진실을 모두 담아내지는 못한다. 앞으로 5백년 흐른 다음에 우리의 후손들이 이 문서를 볼 때 무엇을 알겠는가?

말이 옆으로 흘렀다. 다시 신약의 헬라어 건으로 돌아오자. 복음서 기자들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충분하게 아는 게 중요하다. 지금 신약개론을 강의하는 자리가 아니기도 하고, 그것에 대해서 준비된 게 없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내용 중에서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나오지 모른다는 걸 감안해야겠다. 어쨌든지 그들 복음서 기자들은 대개 유대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중에는 본토인도 있겠지만 디아스포라 유대인도 있을 것이다. 마태는 예수의 사도였으니까 본토인이겠고,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시 중간에서 도망간 그 마가 요한인가? 아니면 베드로의 속사도인 마가인가? (이거 참 목사가 이런 기초적인 사실도 확실하게 모르고 있다니, 신약개론서를 다시 찾아봐야겠다. 그런데 사실 저자들의 신상을 정확하게 알기는 힘든 문제다.)


누가는 사도행전의 저자와 동일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가 실제로 바울을 수행한 의사 누가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하다. 요한은 예수의 제자 요한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많지만 요한서신의 동일인지 확실하지 않고, 장로 요한이라는 말도 있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외경 복음서는 없을까? 신약을 전공한 선생님들에게 물어봐야겠다. 만약 그게 없다면 정말 크게 이상한 일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상당히 오랫 동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지탱해왔고 실제로 사도들은 거의 예루살렘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건 감안한다면 히브리어 복음서가 없다는 사실이 더 이상하다는 말이다. 아마 그들은 그런 걸 기록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들의 생존 시에 재림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에 대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사도들이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에 대해 굳이 문서로 남겨둘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에 대한 상당히 풍부한 문서가 남겨져 있다. 그게 예수의 언어가 아니라 전혀 다른 패러다임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있던 헬라사람들의 철학적 언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한, 준비하지 못한 역사적 우여곡절이 숨어 있을 텐데, 그걸 우리는 전부 파악하기는 힘들다. 다만 부번적으로만 한 두가지 짚을 수 있을 뿐이다.
지금 나는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 결과만 놓고 그것을 해석하려는 것이다.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기록된 그 내면의 실체로 들어가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된 결과를 놓고 그것의 의미를 설명해보려는 것이다.


헬라어가 신약의 언어라는 말은 기독교 공동체가 히브리어 세계로 부터 헬라어 세계로 넘어왔다는 의미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 같지만, 그 속 사정은 훨씬 복잡하다. 언어라는 게 사람이 만들어낸 것 같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언어가 발생한 다음에는 그 언어가 사람을 규정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말'로 창조했다는 사실, 그리고 '로고스'가 창조 때부터 있었다는 사실, 그 '로고스'가 곧 예수라는 성서의 보도에서도 우리는 고대인들이 언어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신약성서가 예수의 언어로부터 그 당시 유럽의 보편적 언어로 돌아섰다는 것은 예수와 그의 복음이 해석되었다는 걸 전제한다. 해석이라는 건 단순히 문자의 번역에 머무는 게 아니라 삶의 근원에 연결된 문제이다.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이 생각하던 삶의 근원이 헬라인들의 그것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다. 그게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형식적으로만 변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또 다르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니까 여기서는 그만두자. 단순한 변화에 머물리 않았다는 것만은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헬라어가 무슨 언어인가? 소트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 아닌가. 이제 예수의 복음이 철학적으로 해석됨으로써 기독교 공동체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만약 신약성서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고 추정한다면 어쩌면 기독교 공동체는 역사 안에 등장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가정은 거꾸로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공동체가 그리스 지역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그리고 유대 지역의 신자들이 히브리어 문서작업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헬라어가 주류 기독교의 언어로 채택된 것이다. 기독교 역사가 이렇게 흘러가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그 당시에 아무도 없었다. 사도들도 모르고, 사실 바울도 몰랐을 것이다. 역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계의 역사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와중에 기독교는 헬라어를 통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규정해나갔다. 그 결과물이 곧 신약성서이며, 초기 교부들의 문서들이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에는 또 하나의 언어가 개입한다.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 기독교가 그 당시 로마 언어인 라틴어를 선택했다는 말이다. 그 이후로 천 몇 백년 동안 라틴신학의 역사가 이어졌다. 아마 이렇게 말해야 옳을 것이다.
신약성서 시대만 제외한다면 2천년의 신학역사는 모두 라틴어다. 라틴어로 살아간다는 건 로마 사람들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헬라어가 철학적이라고 한다면  물론 라틴어도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법'의 언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제 기독교는 법적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해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다음과 같은 흐름이 정리된다. 기독교의 언어는 종교적 언어인 히브리어로부터 철학적 언어인 헬라어로, 그리고 다시 법적이고 정치적인 라틴어로 변화했다.


종교, 철학, 법 사이에 어떤 상이성과 유사성이 있는지 오늘 말하지 않겠다. 여기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차이가 있다는 것만 지적하면 된다. 간단히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법관과 철학자가 만났을 때 어떤 대화가 가능하겠는지.
신학자와 철학자가 이 세상을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는지. 예컨대 '배상만족설' 같은 개념은 철저하게 라틴신학의 영향이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용서를 받으려면 하나님에게 배상해야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그 배상을 만족시켰다. 이런 배상만족설은 철저하게 로마 법의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루터의 칭의론도 역시 이런 법적인 차원이다. 종교에서 철학으로, 철학에서 법으로 그 중심이 바뀌었다고 해서 기독교의 본질이 훼손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언어의 차이를 우리가 전제해야하며, 특히 기독교가 자기의 본질을 문자적으로 고수하지 않고 오히려 해석해나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언어는 늘 해석을 요구하는 법이다. 기독교가 세 언어,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를 포함하고 있다는 건 변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역동성의 기초가 된다. 그런 언어들 속에 있는 존재론적 깊은 의미를 담아내려고  부단히 수고한 그 흔적을 오늘 우리는 신학의 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금도 그런 역사는 계속된다.  그렇다면 오늘, 한글로 신학하는 우리는, 우리말로 신앙 하는 우리는 무얼, 얼마나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을까? 아니 해석이라는 그 세계를 용납하고 있기라도 하는가? 언제쯤이면 우리말도 세계신학의 한 중심으로 설 수 있을지.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기독교의 여러 언어 전통에 우리 식의 사유로 참여할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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