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오늘 오후에 집에 들를 일이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자전거 펑크가 났다.
이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데 웬일인지. 자전거를 끌고 가서 자전거포집에 맡겼다.
그 집은 이 자전거를 산 집인데, 우리 테니스 동호회원이기도 하다.
자전거를 맡기고 걸어서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하양 다리 부근에서 무를 싣고 가는 타이탄 트럭을 만났다.
그런 타이탄 트럭이야 매일 보는 것이지만,
그 안에 무가 담겨 있다는 게 전혀 새로운 어떤 것으로 다가왔다.
무!
최소한 물이 95% 이상 되지 않을까?
깍두기의 재료는 물론이고, 소고기국에 없어서는 안 될,
아마 오뎅국물에도 반드시 필요한 게 바로 무 아닌가.
타이탄 트럭에 실려 시장으로 나가는 그 무를 본 순간
나는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함께 무 서리를 하던 때가 생생하게 생각났다.
그 장면은 내가 구구절절이 묘사하지 않아도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이신전심으로 느끼실 것이다.
남의 밭에서 뽑아먹는 그 무 맛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랫부분보다는 윗 부분, 그러니까 푸른 잎 색깔이 나는 부분에 더 고소했다.
남의 밭에서 뽑아먹었지만 그렇게 밭을 망칠 정도는 아니었다.
친구들과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놀다가
배가 고프거나 목마를 때 한 두 개를 뽑아서 먹는 정도였다.
그때 먹던 그 무가 오늘도 트럭에 실려 있었다.
도대체 무는 무엇일까? 왜 그렇게 생겼을까?
이 지구가 무슨 조화를 부려서 무를 그렇게 세상에 보냈을까?
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개념으로 설명한다면,
이 세상의 질료에 형상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했기에 그런 무가 되었을까?
사실 무의 질료, 또는 무의 원소는 이 세상 안에 있는 것들이다.
우리 인간도 역시 이 세상 안에 있다. 지렁이도 역시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이다.
해바라기 역시 그렇다.
민들레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와 인간을 구성하는 원소는 모두 한결같이 이 세상의 것들이다.
같은 지구의 원소들인데, 어느 쪽은 무가 되고, 어느 쪽은 사람이 되었을까?
무와 사람이 과연 다른 게 무엇일까?
사람은 생각할 줄 알고, 무는 생각이 없다는 게 다른가?
이것만큼 큰 오해도 없을지 모른다.
우리는 왜 우리만 생각하는 존재라고 단정하는가?
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도대체 생각, 또는 사유가 가장 우월한 속성일까?
어쩌면 이 세상에 던져진 돌멩이 하나도 무의미한 것은 없을지 모른다.
어쩌면 돌멩이와 나비는 서로 대화할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이 감각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교만이다.
다른 글에도 한번 썼지만 이름 없는 꽃 한송이와 별빛이 나누는 대화를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대화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참된 대화가 이 세상에는 많을지 모른다.
흡사 시각 장애인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소리를 포착하듯이 말이다.
오늘 낮에 내가 본, 트럭에 실려 가던 무는 어떤 세계와 만났을까?
그게 나는 궁금하다.
무와 땅이 나눈 대화가 궁금하다.
무와 물이 나눈 대화가 궁금하다.
무와 밤안개, 또는 이슬, 서리와 나눴을 그 비밀스런 대화가 알고 싶다.
물론 성서는 이런 것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한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각각 구약과 신약의 중심 주제이다.
그러나 성서가 침묵하고 있다 해서 없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면 그런 숨어있는 세계에 조금씩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성서를 기본 바탕으로 우리는 훨씬 깊고 넓은 세계로
우리의 생각을 심화, 확대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는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일부를 말할 뿐이지
전체를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성서가 불완전하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충분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여전히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는 뜻이다.
모든 생명의 비밀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될 그 종말을 향해서
어떤 궁극적인 질문과 그 나름의 대답을 제시하고 있는 게 곧 성서이기 때문에
그런 성서를 읽는 우리는 그런 종말론적 시각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종말에 완성될 그런 생명의 신비가 우리를 설레게 한다.
그런 기다림이 우리를 긴장시킨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도대체 생명의 실체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이미 오늘 낮에 본 그 무 안에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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