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윤선박사

바른 교회 / 박윤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10. 5. 06:44


바른 교회  

 

1. 교회는 성결(순결)해야 됨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롬 12:1)

 

  인간은 자존자(自存者)가 아니며 자율자(自律者)도 아니다. 그는 의존자(依存者)로서 하나님을 섬길 자이다. 그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쳐야 된다는 사실이다. 본문의 “너희 몸을 … 드리라”는 말씀은 우리 자신을 드리라는 것과 같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쳐야 되는 이유는 나 자신은 모든 것의 초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몸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를 다 큰 것으로 아는 까닭이다. 우리가 작은 은혜라고 생각하는 그것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것으로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까닭이 아니라, 그것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나타내려 함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에 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도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말해서 “거룩한 산 제사”는 무엇인가?

 

 1)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화(聖化)되어 감

 

  “성화”는 무엇보다도 기독신자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끗해지는 것이다. 그는 전에 즐기던 죄악을 끊는다. 헨리 알라인은 시편 38편을 읽다가 그 말씀이 자기의 영혼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듯한 은혜를 받고 죄를 심히 아프게 깨달으면서 기도하던 중 사죄의 기쁨을 얻었다고 한다. 1823년에 빌리 브레이는 기도하기를 “당신이 말씀하시기를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지요, 나는 믿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그는 그의 영혼이 아주 새로워지는 사실을 체험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성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점진적이다. 우리가 성결을 찾아야 할 이유는 육체적 행복보다 성결을 더 귀히 여겨야 되기 때문이다(히 12:4).

 

 2) 성별(聖別)을 힘쓸 것

 

  “성별”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를 비진리와 섞지 아니함이며, 하늘나라의 것을 세속화하지 아니함이다. 고후 6:14∼17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였다.

 

  교회가 진리를 증거하다가 어떠한 희생을 당하든지 그것은 소금의 직분을 행한 것이고 성별의 생명을 가진 운동이다. 우리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역사를 회고해 볼 때 성별운동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것이 속화운동과 충돌해 오면서 교회의 생명을 보전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상고시대에 가인과 아벨의 다툼은 성별과 속화의 충돌이었다. 아벨은 가인의 속화운동에 삼키우지 않고 끝까지 참된 신앙을 파수했으므로 성경은 증거하기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고 한다.

 

  스웨덴 서부에는 교회가 많기로 유명하다. 또 그곳의 기독신자들은 비타협주의로도 유명하다. 그 나라의 성도들은 교회에서 사경회를 하는 몇 날 동안 계속 상점 문을 닫고 집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 나라 교회에 이 같은 신앙 분위기가 이루어진 것은, 19세기에 헨릭 솰토(Henrik Schartau) 목사가 모든 합리주의자들과 충돌해 가면서 성경 진리의 절대성을 파수한 결과이다. 그 당시에 솰토와 함께 바른 신앙노선에서 일하던 목사들은 책벌도 받았고 출교도 당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의 진리파수 운동으로 말미암아 스웨덴의 서부는 강한 신앙의 지역이 되었다.

 

  노르웨이에는 한스 닐센 하우게(Hans Nielsen Hauge)라는 신앙 인물이 일어나서 합리주의와 충돌하고 아홉 번이나 투옥된 일이 있었다. 그는 현대 “노르웨이의 아버지”라고 불려 오고 있다. 그만큼 그의 영향력은 컸다.

 

 

2. 교회는 화평을 유지해야 됨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교회는 “순결”을 주장하는 동시에 “화평”도 주장한다. 그런데 이 둘은 함께 주장되기 어려운 경우를 만날 때도 있으니, 신자들이 순결을 주장하는 가운데 순결치 못한 자들의 공격을 당하여 다툼이 일어나기 쉽다. 순결과 화평은 함께 있어야 하겠지만 이 둘의 공존(共存)을 유지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둘의 공존을 위하여 노력해야 된다.

 

  그 노력이 진리와 법도에 근거한 것이라면 좋은 열매를 가져올 수 있다.

 

 1) 화목하는 자는 남을 잘 이해하는 자이다. 그는 남들의 실수를 자신의 실수와 같이 생각하고 자신도 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자이다.

 

 2) 화목하는 자는 옳은 말이라도 부드럽게 하는 자이다. 잠 15:1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하였다. 신자들이 혹 의분(義憤)으로 인하여 과격하게 말하다가 화목을 깨뜨리는 일이 있다.

 

 3) 화목하는 자는 용서하는 자이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마침내 자기에게 유익을 가져온다. 잠 19:11에 말하기를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고 하였다. 신자들이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쪼개듯이 작은 허물까지 들추어 낸다면 그것은 잔인한 행동이다.

 

 

3. 교회는 증인 단체가 되어야 함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그의 제자들에게 최후로 주신 말씀이다. 동시에 이 말씀은 교회에 사명을 주신 지상 명령이다.

 

 1) 교회는 세상 나라의 특권 계급이 아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소망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신다면 그때에 저희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같은 야망을 교정하시고, 그들의 사명은 오직 증인(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이 세상에서 핍박과 멸시를 받게 되지만 그 가운데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 일을 감당하게 된다.

 

  화란의 스미테스 목사는 복음적인 전도자이다. 그의 간증에 의하면, 그와 그의 부친과 그의 모친이 함께 교회를 개척하기 위하여 벨기에의 부르게라는 도시에서 건물을 하나 사서 깨끗이 수리하고 그 동네 주민들을 초청하였다.

 

  교회로 모이는 첫주일 예배시간에 그의 부친은 설교하고, 그의 모친은 독창하고, 그는 풍금으로 반주하였다고 한다. 그 시간에 참석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는 술에 취하여 들어와서 예배를 방해하였다. 그 전날 초청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반대자들의 책동과 방해로 인하여 오지 못하게 되었고 다만 술취한 그 사람만이 반대자들의 보냄을 받아서 참석하였던 것이다.

 

  그 예배가 끝난 뒤에 술취한 그 사람은 예수를 믿기로 굳게 약속하였고 그 이후 그는 신실한 신앙인으로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우리는 이 중대한 사실을 기억하자! 즉, 핍박이 있는 곳에 성령님의 역사가 특별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벧전 4:14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였다. 복음 증인의 분깃은 이 세상에서 주장하는 권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멸시와 핍박을 받음이다.

 

  교회는 세상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성령님의 권능을 의지해야 된다. 과거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문제에 있어서 국교주의(國敎主義)를 취했던 이들은 이 진리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4세기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결과 교회는 점점 형식주의로 흘렀고 신령한 능력은 약화되었다. 오늘날도 구라파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한 나라의 교인들은 대다수가 주일에 교회 출석을 하지 않는다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사 2:22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하였다.

 

 2) 교회는 정치 운동에 직접 가담할 수 없음

 

  교회가 직접적으로 정치운동에 가담하지 않는 이유는 1) 교회의 일은 신령한 일이요 육체적 업무가 아니기 때문이며 2) 교회의 이름으로 정치운동에 나가면 불신 동포들과 경쟁이 일어나므로 국가에도 해로울 수 있기 때문이며 3) 그 정치운동에 실수가 있을 때에는 온 교회와 그리스도의 이름에 욕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에 대한 일반 사항에 있어서는 신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행할 수 있고, 특별히 정부나 국가에 대하여 신령한 일을 하는 경우에는 교회의 단체 명의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 칼빈은 1514년 2월 2일에 독일 슈피르스에서 모일 종교회의를 앞두고 개신교의 영적 승리를 위하여 찰스 5세에게 신령한 교리를 밝히 해석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이유는 그때에 찰스 5세가 그 종교회의를 소집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칼빈의 편지는 실상 신교도들을 대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순전히 신령한 일에 관계된 것이었다. 

 

- 출처: 기독교 개혁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