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제사보다 순종 (삼상 15:17-31)

새벽지기1 2016. 9. 23. 06:34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은 제사를 핑계대며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제사 곧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의식이다.

그런데 사울은 불순종의 죄를 모면하려고 제사를 위한 것이었다고 변명을 한 것이었다.

 

제사를 위한 것이었다면 불순종한 죄가 덮어질 줄 알았다.

사울의 죄는 엄연한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는데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거기다 죄를 더하여 이 불순종을 제사를 위한 것이라고 변명한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이 정곡을 찌르고 한 말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이고

듣는 것이 제사로 드리는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는 것이다.

 

이 문맥을 무시하고서, 순종이 제사보다 나으니 제사는 필요 없다로 가면 자유주의 신학에 떨어지고 만다.

그들은 교회와 예배를 부인하고 삶에서의 예배와 순종이면 된다고 한다.

자기들의 인간적인 자유를 위해서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는 것이다.

 

교회와 예배 없이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와 예배에 멀어지면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상례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사울왕이 왜 하나님과 사무엘 앞에서 이지경이 되었을까? 를 살펴 보고 교훈을 받고자 한다.

 

1. 사울이 불순종한 것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다.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게”(1) 하셨다.

자기가 언제부터 왕이었다고 왕노릇 조금하더니

여호와의 명령과 뜻을 좇기보다는, 자기 뜻을 따라 안하무인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

조금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어느새 사람이 바뀌어 안하무인이 되고 만다.

궂은 일은 손도 안댈려고 하고 상전 노릇만 할려고 한다.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에 눈돌리고 어느새 특권층 행세를 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멸망의 앞잡이다.

(잠 16:18-19)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교만은 오래 가지 못한다. 패망하고 멸망하는 날이 금새 오고 만다.

왕년에 큰 소리 치고 교만하던 사람들 중에 지금도 여전한 사람 있나 찾아보라.

 

그런데도 조금만 쥐었다 하면, 그것이 영원한 것인줄 알고

상대방과 약자들을 무시하고, 자기들 좋을대로, 온갖 악행을 저질른다.

세상 인심이 항상 내편인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역사는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뀌어 왔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되고 하기를 수천 만 번 이어져 왔다.

한치 앞을 못내다보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 열매를 거둘 날이 온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으로만 아니라,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지금 고난을 겪는다고 힘을 못편다고 가진 게 없다고 서러워하지 말라.

세상은 지금 힘 가진 자들이 다스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세상은 하나님이 사랑과 공의로 다스리고 계신다.

 

내가 지금 어떤 형편에 있든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지금 가진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과 법도대로 살기를 힘쓰고 있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역전할 날이 반드시 온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인내와 연단 없이 축복의 그릇 영광의 그릇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내와 연단을 거치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이 큰 일에 쓰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한나는 브닌나에 비해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브닌나는 아들이 있다고 교만하여 한나를 괴롭혔다.

한나는 괴로움 끝에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 기도는 응답되었다.

 

사무엘을 낳고 나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다시 기억하라.

(삼상2:1-10)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내가 지금 물어야 할 것은 언제 이루어지느냐가 아니고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이다.

(행1:7)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내가 할 것은 주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피로 주고 사신 것이다.

이제 좀 안다고, 어느새 자기 뜻을 앞세우기 시작하면 그것이 교만이다.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우리는 항상 물어야 한다.

어느 것이 아버지의 뜻인지를 묻고 그 길을 선택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열심이 있었으나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았다.

자기 의는 자기의 옳은 뜻이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옳은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이다.

신 28장의 복과 저주는 오직 오늘 명하는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에 순종했느냐로 갈라진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윗도 성숙하기 전에는 나발의 남자들을 다 보복하여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겼다.

(삼상 25:22)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전해도 자기들의 뜻을 앞세워 듣지 않았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다.

그러면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보다는 소유와 환경을 먼저 구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얻지 못하고 있던 것도 다 빼앗기고 없어지고 만다.

자기를 위해 땅에 쌓아둔 보물은 동록이 해하고 도적질 당하고 만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하늘에 쌓아둔 보물은 그런 일이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서는 거역하지 않아야 한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다.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

 

지금 명하시는 하나님의 뜻, 말씀을 버리면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신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23절, 26절)

 

13장에서도 같은 말씀이 나온다.

(삼상13:13-14)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급하다고 제사를 드리고 말았다.

그것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않은 것이었다.

그 제사 한 번에 왕위가 왔다 가고 말았다.

하여튼 사울은 제사를 드려서 망하고, 제사를 핑계 대다 망한 사람이다.

사실은 제사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 문제이었다.

 

오늘 명하는 말씀에 순종하느냐에, 왕권의 복이 오기도 가기도 하고,

축복과 저주가 갈린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 사울이 불순종한 것은 탈취하기에만 급했기 때문이다.

 

분명 하나님의 말씀은 “가서 죄인 아말렉의 사람들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였다.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15:3) 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아말렉이 대적한 일로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탈취하기에만 급하였다.

(삼상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그리고 사울은 의기양양하여 갈멜에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까지 세웠다.

그 시간 무렵에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다.”(15:11)

 

좋은 것을 탈취하기에만 급하다 보면, 하나님도 하나님의 명령도 안중에 없게 된다.

변화산상에서 베드로는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거하자고 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는데, 뜻보다는 영광이 유익이 급했다.

좋은 것을 탈취하기에만 급한 것이다.

 

내게 유익하고 좋은 것 영광스러운 것을 탈취하기에만 급하면 하나님의 뜻은 보이지 않는다.

(삼상15: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좋은 것을 탈취하기에만 급하다 보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게 된다.

탈취하가에만 급하다 보면,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게 된다.

자기에게 좋고 유익한 것을 좇는 것이 바로 탈취하기에만 급한 것이다.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 위함이었다..

(빌 3:7-9)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다윗이 압살롬의 난으로 쫓겨갈 때 많은 신하들이 압살롬에게 붙었다.

자기들에게 유익한 것을 탈취하기에만 급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둘람 굴 시절에 고락을 같이 했던 아둘람 출신들은 배신하지 않았다.

세가 불리하다고 해서 탈취하기에만 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좋은 것을 좇아 탈취하기에만 급했던 사람들은 기대했던 왕권을 잃고 말았다.

뜻을 좇아 탈취하기에 급하지 않은 사람들은 잃을 줄 알았던 왕권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당장의 좋은 것, 유익한 것에만 눈이 팔려,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오늘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보지 못한다.

 

이익과 편안함을 탈취하기에만 급하면 왕권을 얻는 게 아니라, 잃고 만다.

당장은 어렵고 힘들더라도 뜻을 좇아야 왕권을 얻을 수 있다.

사울의 왕권에 붙어 유익과 편안함을 택했던 사울의 사람들은 사울과 함께 망하였고,

뜻을 좇아 고난을 택했던 다윗의 사람들은 때가 되어 왕권을 함께 세우는 사람들이 되었다.


3. 사울이 불순종한 것은 하나님보다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24)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백성을 두려워하여 백성들의 말을 청종하느라고 하나님의 명령과 선지자의 말씀을 어겼다.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말을 듣느라고

하나님의 명령과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이다.

 

사울이 두려워한 것은 백성이 아니라 사실은 잃게 될 기득권이었다.

그들이 자기 왕권을 유지시켜준다고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힘으로 보이지 않고, 사람은 힘으로 보인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의지하고 힘으로 삼는 사람은 사람 없는 곳으로 갈 날이 온다.

(렘17: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을 받게 된다.

(렘17:8)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왜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게 될까요?

그들이 눈에 보이는 힘을 갖고 있고, 관계가 이미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진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간다는 것은 이 익숙한 기득권을 잃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향해 가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기득권과 관계냐? 아버지의 뜻이냐? 그것이 문제일 때가 많이 있다.

바울과 사도들은 항상 후자를 택한 사람들이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행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브라함은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명하는 땅으로 갔다.

모세는 40년 동안 익숙한 왕궁을 버렸고, 요셉은 특권이 보장된 아버지 집을 떠나가야 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원리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과 선지자의 말씀보다는,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말을 듣다가, 왕권도 잃고 망하고 말았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기득권과 관계에 연연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였다.

아버지의 영원한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며 십자가에 못박았다.

 

백성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면서 못박았다.

기득권과 관계에 연연하다 보면 죄없는 자손들도 악행의 벌을 뒤집어 쓰게 된다.

자신 있었겠지요. 그 눈으로 보면요.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감당키 힘든 엄청난 죄악이었다.

 

30절에 보면, 사울은 자기가 범죄하였다고 인정하면서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백성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앞에서 자기를 높여 달라고 하였고

그 방법이 또 여호와께 경배하는 것이었다. 또 제사였다.

 

하나님은 이미 버린 왕권인데, 사무엘을 강권하여 제사를 드림으로

백성들에게는 인정받기 위한 제사였다.

3번의 사울의 제사가 다 자기의 이익과 영광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무엘 선지자가 아무리 말씀을 전해 주어도, 전혀 말릴 수가 없는 사람이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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